영화 '파묘' 열풍…서울에도 이장한 조선왕릉이 있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4.03. 15:38

수정일 2024.10.22. 14:15

조회 2,886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처음 한양 북부 황화방(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됐던 정릉은 경기도 양주 남사아리(현재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로 옮겨졌다.
처음 한양 북부 황화방(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됐던 정릉은 경기도 양주 남사아리(현재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로 옮겨졌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8) 왕릉을 옮기다

무덤의 이장과 제사, 무당과 굿 등 새로운 볼거리를 보여준 오컬트(Occult) 영화, ‘파묘’가 1,1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엄청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 초자연적 현상을 뜻하는 오컬트 장르의 영화가 이처럼 관심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집안에 거듭되는 우환으로 할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하는 상황에서 시작하는 영화의 장면처럼 조선 왕실에서도 무덤을 옮기는 천릉(遷陵) 사례가 있었다. 특히 현재 서울에 있는 왕릉 중에서도 천릉의 사연을 담은 왕릉들이 있다.

정릉은 옮겨졌지만, 동네 이름은 정동

천릉을 하려면 이전의 무덤을 다시 파고 관을 꺼내는 ‘파묘’ 행위가 먼저 이루어졌고, 왕실 의례에 따라 이장을 하였다. 조선 왕실 최초의 천릉은 처음 한양 북부 황화방(皇華坊: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되었던 정릉(貞陵)을 경기도 양주 남사아리(南沙阿里:서울시 성북구 정릉동)로 옮긴 것이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으로, 1396년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는 곳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왕이 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석과 크게 대립했던 태종은 궁궐에서 왕비의 무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408년 태조 승하 후, 태종은 무덤을 양주 검암산 자락(현재의 구리시 동구릉 경역)에 정하고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태조는 신덕왕후 곁에 묻히는 것을 바랐지만, 태조 승하 후 정릉 이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태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정릉의 이전을 지시했고, 1409년 정릉은 경기도 양주로 이전되었다.
청계천 광통교 안내문에는 광통교 복구에 사용된 왕릉 유적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청계천 광통교 안내문에는 광통교 복구에 사용된 왕릉 유적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태종은 홍수 피해 방지를 위해 한양 도심을 관통하는 개천 청계천을 1412년에 조성하였다. 청계천 다리 중 광통교는 처음 흙으로 만들었는데, 서울에 큰비가 내려 다리가 사라지자 태종은 돌로 된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의 석축에는 정릉에서 가져온 병풍석과 십이지신상의 석물을 이용했다. 2005년 청계천 복원 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정릉의 석물들이 발견되어, 600년 전 신덕왕후와 태종의 갈등이 나타난 역사적 현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정릉이 경기도 양주로 이장되면서, 이곳은 ‘정릉동’으로 불려졌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원래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일대는 정동(貞洞)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릉은 옮겨졌지만, 원래 정릉이 있었던 동네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헌릉 전경. 세종의 영릉이 처음 조성된 곳은 헌릉 좌측이었다.
헌릉 전경. 세종의 영릉이 처음 조성된 곳은 헌릉 좌측이었다.

원래는 서울에 있었던 세종의 영릉이 여주로 간 까닭?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의 영릉(英陵)도 원래의 위치에서 이장된 무덤이다. 영릉이 처음 조성된 곳은 경기도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현재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던 헌릉(獻陵) 좌측이었다.

『태종실록』 1422년 9월 6일에는 태종이 승하하자 헌릉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세종은 태종의 무덤 헌릉을 조성한 후에 그 왼쪽 옆자리를 비워두게 했다. 사후에 자신도 아버지 옆에 묻히려 했기 때문이다. 1446년 세종은 왕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세종은 헌릉 경역에 무덤을 조성했다.

당시 풍수지리가들이 길지가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이곳에 무덤을 만드는 것을 반대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 복지(福地)를 얻는 것이 선영 곁에 장사하는 것만 하겠는가? 화복의 설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 나도 나중에 마땅히 같이 장사하되 무덤은 같이 하고 실(室)은 다르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며, 무덤의 조성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도 반드시 이곳에 쓸 것을 지시했다.

세종의 강력한 의지를 이어받아 문종은 헌릉 옆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예종 때에 이르러 이장이 결정되었다. 처음 세종의 무덤을 조성할 때부터 풍수지리가 최양선은 이곳이 무덤이 들어설 땅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곳에 무덤을 쓰면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사가 끊어지고 장자가 훼손된다)’ 된다고 하였고, 문종과 단종, 세조의 적장자 의경세자 까지 작장자가 연이어 일찍 사망하면서 예언은 너무나 정확히 적중했다.

영릉이 불길한 곳에 조성되었음을 인식한 세조는 영릉 천릉을 추진하도록 하였고, 예종 때 마침내 이장을 실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길지로 선정된 곳이 현재의 여주시에 소재한 영릉 지역이었다. 여주시는 세종의 무덤이 이곳에 옴으로써, ‘세종의 도시’임을 널리 알리고 있는데, 여주 쌀의 브랜드가 ‘대왕님표’가 된 것 역시 세종대왕을 널리 기억하지는 뜻을 담고 있다.
성종대왕릉과 정현왕후릉이 있는 '선릉'으로 가는 길.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숲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성종대왕릉과 정현왕후릉이 있는 '선릉'으로 가는 길.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숲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중종의 정릉이 강남 한복판으로 온 사연

조선의 왕릉 중에서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왕릉이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선릉(宣陵)과 중종의 정릉(靖陵)이 그것이다. 지하철 2호선의 역명 ‘선릉’과 9호선의 역명 ‘선정릉’은 바로 왕릉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중종의 정릉은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한 후 처음 묻힌 곳은 경기도 고양시 현재의 서삼릉,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위치한 곳이다. 희릉은 1515년 중종의 계비로 들어왔던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1515년 사망한 후 조성된 무덤이었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서울 선릉과 정릉' 입구. 접근성이 뛰어나 많은 시민들이 찾는 왕릉이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서울 선릉과 정릉' 입구. 접근성이 뛰어나 많은 시민들이 찾는 왕릉이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중종의 무덤을 조성했다. 무덤의 이름은 희릉에서 정릉으로 바뀌었다. 왕비의 무덤이 먼저 조성된 후에, 왕의 무덤이 나중에 곁에 오면 이름을 고치는 사례에 해당한다.

중종의 정릉은 명종이 왕으로 있던 시절 현재의 강남구 지역으로 옮겨졌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을 움직여, 남편의 무덤을 옮기게 한 것이다. 문정왕후가 내세운 논리는 중종의 무덤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 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당시 상황에 대해 사관(史官)은 “능침을 옮기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산이 무너지거나 물에 패여 나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능을 옮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풍수의 길흉설로 옮기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옮길 만한 아무런 까닭도 없이 대중의 의사와 여론을 어겨가며 옮기는 것이겠는가.”라 하면서, 명종이 당시의 여론을 무시하고 천릉을 한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어서 “중종께서 돌아가신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었던가. 그동안 체백(體魄)이 이곳에서 편안히 지냈고 혼령도 이곳에 노셨으며 희릉과 효릉(孝陵:중종의 아들 인종의 무덤)도 이곳에 있으니, 인정으로 신명의 도를 미루어 보건대 어찌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번 천릉한 일은 상의 뜻이 아니고 문정왕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백성이 모두 알고 있다.”고 하여,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이 옮기게 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조선후기 학자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중종의 천릉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큰 문제가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 ‘능을 옮길 때에 광중(壙中)으로부터 곡성이 났는데 일하는 사람 중에 안 들은 자가 없다.’고 하더니,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명종의 장자)가 죽고, 2년 뒤에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또 2년 뒤에는 명종이 승하하니, 사람들이 능을 옮긴 탓이라고 말하였다. 임진년에 이르러 정릉이 왜적들의 발굴을 당하였으니 신민들의 통분을 어찌 모두 말할 수 있으랴.”고 기록하고 있다. 천릉을 한 것이 후대의 저주로 이어졌다는 세간의 평을 전한 것이다.

중종의 무덤을 옮기면서, 중종과 장경왕후를 떼놓는 데는 일단 성공했지만, 문정왕후는 바람대로 중종 곁에 묻히지를 못했다.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때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서 신하들이 이곳에 무덤을 쓰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태릉의 능침과 주위의 여러 석물들
태릉의 능침과 주위의 여러 석물들
결국 명종은 지금의 노원구 지역에 문정왕후의 무덤을 조성하고 태릉(泰陵)이라 하였다. ‘태릉선수촌’, ‘태릉갈비’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종은 3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문정왕후의 과욕 때문에 1명의 왕비도 곁에 두지 못한 채 현재 강남 빌딩 숲속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그나마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선릉이 곁에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태릉 곁에는 사후 명종이 이곳으로 와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명종은 이례적으로 아버지 곁에 가지 않고, 어머니 무덤 쪽에 와 묻혔는데, 강릉(康陵)이 그것이다. 태릉과 강릉을 합하여 ‘태강릉’이라 부른다.
강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 형태이다.
강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 형태이다.
왕릉을 이장하려면 무덤을 파내는 ‘파묘’가 먼저 행해지기 때문에 후대 왕이 왕릉을 옮기는 일은 큰 부담이 수반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왕릉에 대한 풍수지리적인 신념과 정치적인 이유 등이 합해지면서, 조선왕실에서는 여러 차례 천릉이 있었다. 서울에 소재한 왕릉의 천릉 이외에도 현덕왕후, 인조, 효종, 사도세자, 정조의 왕릉 등도 당시의 상황 논리에 맞추어 천릉이 이루어졌던 사실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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