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이야기가 모이던 곳! 서울에 생긴 근대 서점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1.31. 15:14

수정일 2024.02.20. 15:20

조회 3,292

책 읽는 풍경은 많이 사라졌지만, 활자로 된 책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
책 읽는 풍경은 많이 사라졌지만, 활자로 된 책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4) 근대 서점의 탄생

책을 읽는 풍경은 아름답다. 공원 벤치, 지하철, 휴게소, 카페 등에서 책을 읽는 풍경은 많이 사라졌지만, 활자로 된 책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 출판이 쉽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주로 책을 필사하여 읽었고, 도서 대여점과 같은 세책(貰冊)업도 등장했다. 

아예 대중들에게 책을 들려주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사람도 나타났다. 근대 서점의 탄생은 책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동시에, 독서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서점의 탄생과 그 뒷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전기수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에서 읽기를 중단했다.
청중들이 돈을 던지면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즘 방송에서 시청자가 궁금해 하는 장면에
광고가 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서쾌(書儈)의 등장과 세책업, 그리고 전기수

조선시대에도 시대가 지남에 따라 책에 대한 수요는 점차 늘어났다. 활자로 인쇄된 책은 주로 국가가 중심이 되어 편찬되었고, 민간에서는 주로 필사한 책이 유통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상업 경제가 발달하고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이 확산이 되면서 소설류가 대거 유통되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던 만큼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貰冊業)이 자리를 잡아 나갔다.

영조 대인 1752년(영조 28) 4월 19일, 죄인 박섬(朴暹)을 심문하는 공초에서 “신은 이인석과 함께 책사(冊肆:책방)를 내고 있는데, 이양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략(史略)』 초권을 가르친다고 간 뒤에 다시 와서 『대명률』을 사 가지고 갔습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책방이 운영되된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1925년 문을 연 주식회사이문당, 출판, 학용품 판매, 보통학교 전과 참고서를 발행했다.
1925년 문을 연 주식회사이문당, 출판, 학용품 판매, 보통학교 전과 참고서를 발행했다.

정조 시대의 학자 채제공(蔡濟恭)의 문집인 『번암집(樊巖集)』의 ‘여사서서(女四書序)’에는 “근세 규각(閨閤:부녀자들)이 경쟁하는 것으로 오직 패설(稗說)을 숭상하는 것을 기록할 만하다. 날로 증가하여 그 종류가 천백 종인데, 쾌가(儈家:도서 대여점)에서는 이것을 깨끗이 베껴서 쓰고 빌려서 보게 하였다. 번번이 그 값을 받아 이익으로 삼았다.”고 기록하여, 세책업이 성행하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책을 중간에서 판매하는 중간 상인서쾌가 등장하고, 대중들이 모인 곳에서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나타난 것도 책에 대한 욕망이 분출되던 시대의 흐름 때문이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신선전(曺神仙傳)’에서 서쾌 조신선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신선(曺神仙)이라는 자는 책을 파는 아쾌(牙儈:중간 상인)로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는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神光)이 있었다. 모든 구류(九流), 백가(百家)의 서책에 대해 문목(門目)과 의례(義例)를 모르는 것이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마치 박아(博雅)한 군자(君子)와 같았다. 그러나 욕심이 많아, 고아나 과부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을 싼 값에 사들여 팔 때는 배로 받았다. 그러므로 책을 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언짢게 생각하였다. 또 그는 주거를 숨겨서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남산 옆 석가산동(石假山洞)에 산다고 하나, 이 역시 분명치 않다.”
명동에 위치했던 금강당 서점의 모습
명동에 위치했던 금강당 서점의 모습

책을 읽어주는 사람 ‘전기수’에 대한 황당한 사연은 정조 대의 학자 이덕무(李德懋)의 문집 『청장관전서』의 ‘은애전’에 보인다. 정조는 김은애의 사건을 판결하면서, 이덕무로 하여금 ‘은애전’을 짓게 했는데, ‘은애전’의 앞부분에는 “옛날에, 어떤 남자가 종로 거리의 담배 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하는 곳에 이르자 홀연히 눈이 찢어질 듯이 거품을 북적거리며 담배를 써는 칼을 들어 소설책 읽는 사람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기수가 워낙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이를 실제의 일로 생각한 사람이 전기수를 살해하는 데 이르렀다는 것이다.

19세기에 활약한 중인 출신 학자 조수삼(趙秀三;1762~849)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전기수도 항목에 들어가 있다. 당시 전기수는 숙향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의 고전소설을 주로 낭독하였으며, 가장 흥미로운 대목에서 읽기를 중단하였다.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돈을 던지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요즈음 방송에서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장면에서 광고가 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서울에 설립된 최초의 서점은 1897년 광교 근처에 자리잡은 회동서관이었다.
서울에 설립된 최초의 서점은 1897년 광교 근처에 자리잡은 회동서관이었다.

최초의 근대식 서점, 회동서관

근대식 서점의 등장에는 1876년에 이루어진 개항의 영향이 컸다.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신식 인쇄기가 개발되면서 책의 출판이 용이해졌다. 고종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1895년에 반포한 교육입국조서도 영향을 미쳤다.

고종은 ‘국가의 부강은 지식의 개명에 달려 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교육에 필요한 국민 소학 독본, 초등 본국 역사 등 새로운 교과서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도 도서를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공급하는 근대식 서점의 출현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가의 부강은 지식의 개명에 달려 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서울에 설립된 최초의 서점은 1897년 광교(廣橋) 근처에 자리잡은 회동서관(匯東書館)이었다. 현재 종각역 4번 출구 청계천 광교 앞 신한은행 건물 화단 내에는 ‘회동서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주인의 이름이 고유상(高裕相)이어서, ‘고유상 서포(書鋪)'’고도 불렸다. 1880년대 말부터 아버지 고제흥이 서점을 했고, 고유상은 1906년부터 가업을 이으면서 근대식 서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서점, 출판과 함께 문구사 기능도 겸하였다.

회동서관은 『해동명장전』을 1907년에 출간하데 이어, 1908년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일대기를 담은 『화성돈전(華盛頓傳)』을 출간하였다. 1909년에는 지석영이 펴낸 한자 사전인 『자전석요(字典釋要)』가 1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 등도 회동서관에서 출간되었다.

회동서관이 대한제국기 최대 서점이 된 것은 물밀듯 밀려드는 근대 문물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이었다. 1913년에는 한용운이 불교 개혁을 위해 쓴 저술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惟新論)』을, 1923년에는 유교의 연원을 정리한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등을 출간하였다. 고유상은 1920년 서적 출판과 유통을 위하여 서점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조선도서주식회사’ 이사로도 활동하며 근대 시기 출판업과 서점 유통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일제 강점 시기 일본 출판사 및 서점이 대거 유입되면서 그 경쟁에서 밀려났고, 특히 우리말과 우리글이 금지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회동서관은 해방 이후에도 존속하다가 1957년 즈음에 문을 닫았다.

광익서관과 박문서관

광익서관(廣益書館)은 1917년 고유상의 동생 고경상(高敬相)이 종로에서 문을 연 서점이다.(광익서관과 박문서관에 대해서는, 강성호, 『서점의 시대』(나무연필, 2022) 참조) 광익서관은 일본 유학생 잡지들을 주로 출간하고 유통시켰다. 일본 유학생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미래의 저자들을 발굴하려는 뜻도 있었다. 광익서관이 펴낸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와 무도』, 여러 가곡의 악보와 가사를 엮은 『광익창가집』 등이 일본유학생 출신들의 작품이었다.
박문서관에서 출간한 소설 『천변풍경』 『구운몽』 『조선 이태왕실기』(왼쪽부터)
박문서관에서 출간한 소설 『천변풍경』 『구운몽』 『조선 이태왕실기』(왼쪽부터)

노익형(盧益亨):1885~1941이 1907년 4월 경성 남부 상동에서 창설한 박문서관(博文書館)은 1925년 잠깐 봉래동으로 옮겼다가 1925년 이후 종로 2가에 정착하였다. 노익형은 14살 때부터 저포전(苧布廛) 점원, 객주집 거간 등을 하다가 1907년 현재의 남대문로 3가 상동교회 앞에 서점을 차렸다.

박문서관은 처음에는 계몽 서적 중심으로 출간 사업을 하다가, 1910년 일제 강점 시기 이후에는 휴대하기에 편하고 일제의 검열에도 쉽게 걸리지 않는 딱지본 소설을 대거 출판하였다. 1911년부터 1949년까지 약 86종의 딱지본 소설을 출간하여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20년대에는 ‘짠발쟌 이야기’ 등의 번역물과 이광수의 『무정』, 『첫사랑』 등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고소설에 이어 1938년에서 1939년에 간행한 ‘현대걸작장편소설전집’도 널리 판매되면서 일제 강점 시기 문학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해방 후 박문서관은 박문출판사와 박문서점, 박문인쇄소로 분리되었으며, 1957년 폐업 당시 영창서관, 덕흥서림과 함께 서울의 3대 서점으로 꼽혔다.

박문서관은 종로 2가 옛 고려당 건물 바로 옆에 위치했으며, 1990년대까지 서울의 랜드마크 기능을 했던 종로서적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가 서점의 전성기를 이루던 1977년의 조사에 의하면 이곳에만 총 35곳의 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공평도시유적전시관, 2023, 『종로서적』 도록 참조)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서적> 전시회는 내년 3월 17일까지 열린다.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서적> 전시회는 내년 3월 17일까지 열린다.

2023년 7월 21일부터 2024년 3월 17일까지 종로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는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서적’을 주제로 한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인터넷 서점의 등장, 종이책의 쇠퇴와 함께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도시의 지성을 상징하고 약속 장소로도 널리 활용되었던 서점과 맺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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