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와 전차, 근대의 욕망을 안고 달리다(feat.마포종점)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10.04. 15:47

수정일 2023.10.04. 15:47

조회 3,222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증기기관차가 경부선 철도 한강철교를 통해 운행되는 광경을 담은 사진엽서
증기기관차가 경부선 철도 한강철교를 통해 운행되는 광경을 담은 사진엽서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5) 철도와 전차

1899년 9월 노량진과 제물포를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이 연이어 개통되면서, 대한제국의 교통망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종전 도로나 수로가 중심이 된 교통망에서, 철도의 탄생은 산업과 경제의 발전은 물론이고,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질을 확실히 높여주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관련하여 철도가 탄생되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가져오는 대목이다.
한강철교는 경인선 부설과정에서 1900년 준공됐다.
한강철교는 경인선 부설과정에서 1900년 준공됐다.

최초의 철도 경인선과 경부선

경인선은 원래 미국인 모스가 조선 정부로부터 철도 부설권(철도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을 얻어 1897년 3월 29일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자금이 부족해 일본에게 철도 부설권을 팔았다. 이후 일본인 사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가 대표로 있던 경인철도 합자회사가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노량진에서 제물포 구간 33km를 완성했다.

경인선 부설은 이후 일본이 한국 철도를 모두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은 1883년 도쿄 우에노에서 쿠마가야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도호쿠(동북) 본선을 건설해 나가, 1891년에 이르러 최북단인 아오모리까지의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일본 본토의 철도 건설 경험은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는데 큰 노하우가 되었다.

경인선이 처음 개통되었을 때 설치된 역은 제물포에서 축현, 우각동, 부평, 소사, 오류동,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 1900년 7월 8일에는 노량진역에서 경성역까지 노선이 연장되었으며, 11월 12일 경성역에서 경인철도 완전 개통식이 열렸다. 현재 노량진역에서 한강철교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철도 시발지비’가 있다. 1999년 9월 18일에는 한국철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기념우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인 모갈 탱크형 증기기관차가 도안이 되어 있다.

경인선 다음으로 완공된 철도는 경부선으로,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과 관련이 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철도의 필요성에서 경부선의 착공에 나섰다. 1905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개통에 이어 1906년 4월에는 서울~신의주 사이를 잇는 경의선을 완공하였다.
경부선 철로의 종착역이었던 남대문정거장의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
경부선 철로의 종착역이었던 남대문정거장의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

경부선은 1901년 8월 20일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었고,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5월 25일에는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경부선이 개통된 후 9월 11일에는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이 운행되면서 경부선과 일본철도가 연결되는 시대를 맞았다. 

경인선의 개통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한강의 수운(水運) 교통이었다. 인천에서 용산나루로 왕래하던 기선(汽船)은 이틀에 한 번꼴로 줄었고, 운임은 쌌지만 기선에 비해 시간이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린 돛단배도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X자형 철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 안에 철도관리국을 설치하여,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을 직접 장악해 나갔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안에 철도국을 설치하여 철도망의 확장 작업에 착수하였다.

1914년 호남선, 1928년 함경선을 완공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북쪽 국경 지역의 철도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37년 혜산선, 1939년 평원선만포선을 완공하였다.

1942년 4월 1일에는 내륙을 관통하는 철도인 중앙선이 개통되었다. 중앙선은 청량리에서 경주를 잇는 노선이었으며, 총 연장은 386.6km였다. 1935년 청량리에서 양평, 원주, 제천을 거쳐 단양, 영주, 안동을 지나는 345.2km 노선을 확정하고, 중앙선(中央線)이라 명명하였다. 1938년에는 영천역~경주역 구간 37.5 km가 연결되었다. 중앙선은 철도 주변의 광산과 농산물 및 임산물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되었으며, 산맥을 지나는 코스가 많아 다수의 기차 굴을 만들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안동에서 친척이 살고 계시는 서울로 간 적이 있는데, 청량리역에 도착해서 크게 당황한 기억이 있다. 사회 교과서를 통해 서울의 기차역은 서울역으로 알고 있었고, 중앙선의 서울 종점이 청량리역임을 알지 못한 데서 나온 해프닝이었다.

또한 중앙선의 종점은 안동역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2021년 청량리에서 안동을 연결하는 ktx 열차의 완공도 이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중앙선의 처음 종점은 경주였고, 한때 중앙선은 경경선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X자형의 철도가 남북으로 형성되면서, 철도는 교통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화물 운송과 더불어 일반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는 교통수단이 되면서 철도는 근대의 선물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 열차를 타고 통학과 통근을 하는 삶이 새로운 패턴으로 자리를 잡았고, 서울 사람들은 우이동이나 개성, 수원 등의 근교, 나아가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까지 여행하는 문화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성이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일본인은 물론이고 외국인까지 경성을 중심으로 중국, 만주 일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인선부터 시작한 대부분의 철도가 일본이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고,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설치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철도 교통의 시작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전차가 생기면서 교통이 편리해졌다.
철도 교통의 시작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전차가 생기면서 교통이 편리해졌다.

또 다른 교통수단 전차

철도 교통의 시작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또 다른 교통 수단이 생겼다. 바로 전기의 힘을 이용하여 도로를 운행하는 전차의 등장이다. 전차가 처음 설치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으로, 서울 일대의 전력공급권 사업권을 취득한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의 적극적인 검토로 이루어졌다.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등 한성전기 회사의 중심 인물들은 무엇보다 확보한 전기를 쓸 주요 대상을 구상했고, 여기에 전차 공급을 생각한 것이었다. 이들은 고종 황제가 청량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행차를 위해서도 전차가 필요함을 강조하였고, 고종의 허락과 황실의 투자까지 받게 되자 전차 부설 사업은 속도를 내게 되었다. 

전차 철도를 개설하는 의식은 1898년 9월 15일 오후 4시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인연으로 현재 흥화문이 자리했던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1930년경부터 사용되었던 전차의 실물(381호)이 전시되어 있다. 이어서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의 전차선을 설치하였고, 1899년 5월 3일 오후 3시에 첫 시험 운행을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된 전차의 실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된 전차의 실물

1899년 5월 20일에는 개통식을 가지고 운행을 개시하였다. 아시아에서는 1895년 일본 교토에서 노면 전차가 처음 설치되었으며, 도쿄에서는 1902년에 개통되었으니 서울의 전차 개통은 도쿄보다도 3년이 빨랐다. 당시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었고,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차의 운전수는 교토에서 운행 경험이 있는 일본인 중에서 선발하고,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현재의 한전)에서 운영했으므로 경전전차(京電電車) 또는 경전(京電)으로도 불렀는데, 1968년까지 운행되었다. 경성의 전차는 1910년 이후 용산, 원효로, 왕십리, 영천, 노량진 등 외곽지대로 확장되었으며 1941년에는 창경원에서 돈암동 네거리까지 연장되었다. 
1968년을 마지막으로 전차는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사진은 전차궤도 철거 현장
1968년을 마지막으로 전차는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사진은 전차궤도 철거 현장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자동차와 버스가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이 되면서, 1968년을 마지막으로 전차는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역에서 청량리역을 잇는 서울지하철 1호선의 개통은 이제 지하철이 전차를 대신하는 대중교통으로 자리를 잡는 시대가 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일제강점 시기의 소설에서도 전차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다. 1934년에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소설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일’에서는 구보씨가 전차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 
구보는 우선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하나 남았던 좌석은 한 걸음 먼저 차에 오른 
여인에게 점령당했다. 
구보는 차장대(車掌臺) 가까운 한구석에 가서 
자기는 대체 이 동대문행 차를 타고 
어디까지 타고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일

1935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도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이 언론사 농촌활동가 대회에서 만나 학교 기숙사에 돌아갈 때 전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나온다.

1968년 7월에 은방울자매가 발표한 노래 ‘마포종점’은 ‘밤 깊은 마포종점(현재의 불교방송 본사) 갈 곳 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나도 섰다.’로 시작하는데, 서울 전차 마포선의 종점인 마포 차고지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노래를 발표한 직후인 1968년 11월에 전차가 사라진 점도 ‘마포종점’과 묘한 어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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