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만 아는 도시개발의 뒷이야기 '서울은 지금 공사중'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22.12.26. 13:00

수정일 2022.12.26. 16:47

조회 1,763

‘서울은 지금 공사중’ 책자는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 내 ‘서울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다.
시민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 ‘서울은 지금 공사중’은 서울을 바꾼 공무원들의 이야기다. ⓒ조시승

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은 서울의 역사자료 수집, 조사와 연구 및 편찬에 관한 업무를 하는 사업소다. 2015년 1월 설립된 후 지금까지 14차례 서울역사구술자료집을 발간했다. 구술채록 목적은 서울시민과 공무원들의 다양한 체험과 기억을 채록·정리하여 문헌사료의 제약과 공백을 보완하는데 있다. 또 훗날 서울역사연구를 위한 자료를 다양하게 하여 시민들에게 알기 쉽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다. 제1권 <서울토박이의 사대문 안 기억> 에서부터 제14권 <서울의 도시계획을 말하다> 까지 좀더 생생한 서울역사의 숨결을 담았다.

이번에 발간된 15번째 구술자료집 <서울은 지금 공사중>은 경제성장기였던 1960~1980년대 서울의 교량, 도로, 상하수도, 지하철, 예산확보 등 각종 건설 사업 현장의 실무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의 체험을 채록·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개발이 진행중인 영동지구 (1973년). 남북을 잇는 다리는 상판작업이 마무리된 상태다.
개발이 진행중인 영동지구(1973년). 한강의 남북을 잇는 다리는 상판작업이 마무린된 상태다.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은 1960~1980년대 큰 변화를 겪었다. 인구는 1960년 244만 명에서 1980년 836만 명으로 매년 30만 명씩 증가했다. 이 시기 한국 경제도 매년 10% 가까이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서울은 경제성장과 건설의 도시가 됐다.

서울은 도시 근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판자촌으로 대변되던 청계천이 복개되었고, 그 위로는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졌다. 뽕나무와 논밭, 과수원이었던 강남은 영동지구와 잠실지구로 개발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한강을 따라 자동차 전용도로가 만들어졌고, 그 사이에는 다리들이 건설되었다. 땅속으로는 지하철이 달리고, 상하수도 보급과 하수처리장 건설도 이뤄졌다. 일명 ‘조국근대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하수도관 매립공사의 모습 (1976년) 중장비들이 많지 않아 트럭에서 내린 자재는 인부들이 현장으로 날랐다.
하수도관 매립공사의 모습 (1976년) 중장비들이 많지 않아 트럭에서 내린 자재는 인부들이 현장으로 날랐다. ⓒ서울역사편찬원

이러한 변화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혹은 기업인을 뽑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점을 정책적 차원이 아닌 시민들의 일상으로 옮긴다면 달라진다. 출퇴근과 등하교를 위해 다녔던 도로, 한강을 건넜던 교량, 시민의 발이 된 지하철, 매일 마시는 수돗물, 시민들이 배출하는 생활하수를 처리해주는 하수처리장 등 일상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던 것들에 주목하면 공무원들의 활약상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는 모두 5명의 구술자가 등장한다. 박만석(前서울시 하수국장), 손의창(前서울시 청계천 복개공사 보조감독), 최주하(前도시개발공사 개발이사), 김영수(前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이보규(前한강관리 사업소장)이다. 이들은 1960~1980년대 서울시의 교량·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의 건설 현장을 지휘·감독하였던 공무원들이다. 이들이 서울 시민들의 하루하루 일상을 바꾼 현장의 주역들이라 하겠다.
청계천 하수처리장 조감도 (1974년). 일일 처리용량 10만톤 규모다.
청계천 하수처리장 조감도 (1974년). 일일 처리용량 10만톤 규모다. ⓒ서울역사편찬원

첫 번째 이야기는 박만석 전 하수국장의 회고다. 그는 서울시 치수과장과 구획정리과장 등을 역임했다. 청계천 복개공사 보조감독이었던 그는 공사를 위해 거주민들을 철거민정착촌으로 이주시킨 후 복개공사를 했다. 1966년에는 장안동 청계천 하수처리장 건설에 필요한 해외 AID차관 350만불을 얻어 10만톤규모 공사를 했다. 그래도 계속 유입되는 하수처리 용량이 부족해 중랑천에도 하수처리장을 10만톤 규모로 건설했다. 분뇨처리장도 함께 하수처리장 안에 유치하여 한강의 수질오염방지에 크게 기여했다. 

1968년에는 송파대로 건설 사업을 맡았다. 당시는 1·21사태 직후였기 때문에 서울 개발 사업에는 군사적 목적이 반영되었다.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북악스카이웨이' 도로가 대표적인 예다. 그가 맡은 송파대로도 유사시 장비·병사이동이 용이한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단거리의 직선도로인 작전도로로 만들어졌다. 비용은 구획정리를 하면서 나온 '체비지'를 팔아서 충당했다. 1966년에는 여관방을 한 달 동안 전전하며 <서울시 하수도백서>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서울시에는 하수도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가 없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내무부 보고서와 책자들을 수집해 백서를 편찬했다. 그후 1년여 노력으로 <서울시 하수도대장>도 만들었다.
청계천 하수처리장에서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모습. (1976년)
건설된 청계천 하수처리장에서 생활 하수를 처리하는 모습(1976년) ⓒ서울역사편찬원
청계천 복개공사 모습 (1965년). 동네아이들이 공사자재위에서 놀고 있다.
복개 공사 중인 청계천에서 아이들이 자재를 뗏목삼아 노는 모습 ⓒ서울역사편찬원

두 번째 이야기는 손의창 전 서울시 청계천 복개공사 보조감독의 기억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고위공직자가 아닌 현장의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당시 청계천 복개공사의 일상을 보다 자세하고 세밀하게 말해준다. 판자집 철거가 어려워 옹벽공사부터 했다. 당시에는 중장비들이 많지 않아 트럭에서 내린 자재는 지게차가 아닌 인부들이 현장으로 날랐다. 레미콘도 없어서 인력으로 시멘트를 붓고 지게로 지어 날랐다. 

공사는 구간별로 나누어 대림과 현대가 맡았다. 현대 정주영회장은 지프차를 끌고 새벽부터 나와 작업을 독려했다. 현장소장이 회장보다 늦게 나와서인지 자주 교체되었다. 당시엔 대림 작업량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고, 뒤늦게 건설활동을 시작한 현대는 저돌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식사는 함바집(건설현장 식당)에서 해결했다. 제일 아쉬었던 것은 미8군이 메탄가스가 폭발위험성이 있다고 주행을 기피, 철거하고 다시 공사한 것을 꼽았다.
개발이전 논· 밭,과수원 이었던 강남지구의 모습
개발되기 전 논, 밭, 과수원이던 강남지구의 옛 모습 ⓒ서울역사편찬원

세 번째 이야기는 최주하 전 도시개발공사 개발이사의 회고다. 그는 서울시 치수계장을 비롯해 서울대공원 공사과장과 한강관리사업소장 등을 지냈다. 1962년 치수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던 그가 처음 맡았던 업무는 땅속 상수도관의 누수를 탐지하는 검침 인력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누수율이 50% 이상 높았던 당시에는 노후된 관들이 많아서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누수탐지기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땅속에 있는 관에 물이 새는지 헤드폰을 끼고 소리를 들어가면서 찾아내는 업무였다. 노후화된 관을 지속적으로 갈아 유수율은 90%가 넘게 되었다.

또한 강남개발 당시를 회고하면서 개발로 인해 땅값이 수십 배가 올랐고 논밭과 과수원을 가졌던 원주민들이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었다고 술회하였다. 개발 당시 그는 강남대로와 영동대로 등 주요 간선도로 건설을 담당하였다. 영동지구, 시흥지구, 신림지구 등 구획정리사업은 아예 사업소를 만들어 총괄하게 했다. 간선도로를 만들면 지선도 나오고 택지가 생겼다. 도로 건설에 들어가는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굴곡진 구간을 평평하게 만들지 못하고 일정 부분 경사로를 남겨 놓았다. 그 당시엔 공무원들이 땅에 투자하거나 한눈 팔지않고 본인도 정말 열심히 일만 했다. 투기나 이재로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1978년도 초 당시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과천에 소유한 농장에 창경원 동물원 이전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헬기로 둘러보고 '좋은 아이디어다. 규모가 너무 크니까 서울시 구자춘 시장한테 검토해서 시행하라.'고 명령이 떨어졌다. 구시장은 바로 서울대공원 건설사업소를 만들어 착수했다. 1978년 11월 허허벌판에 착공식이 거행되고 미국, 캐나다로 견학 가 배워 설계에 반영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종로3가 홍등가 철거에 대한 일화도 들려주었다.
서울대공원 기공식 장면
1978년 10월 30일에 진행된 서울대공원 기공식 모습 ⓒ서울역사편찬원

네 번째 이야기는 김영수 전 도시계획국장의 기억이다. 그는 지하철본부 공사계장, 건설국 교량계장과 도로과장 등을 지냈다. 대현산 배수지에 물을 올렸다가 자연유하식으로 가정에 공급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지하철 건설에도 참여했는데 당시 11호선까지 있던 도쿄와 비교하면 겨우 10km에 불과했지만 모두들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일했다고 회고했다.
잠수교 전경 (1976년). 수위가 높으면 물에 잠기는 안보개념의 교량이었다.
잠수교는 수위가 높으면 물에 잠겨 안보 개념으로 지어진 교량이다.(1976년) ⓒ서울역사편찬원

1968년 1.21사태로 김신조 일당이 북악산 뒤편으로 넘어와 청와대를 향했다. 안보상 북악스카이웨이를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돈암동 방향으로 딱 사진 한 장 갖고 설계에 착수했다. 공사내역서도 없이 현대건설과 특수계약으로 진행됐다. 안보가 주목적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관광을 표방했다. 정상에 있는 팔각정은 그런 사유로 만들었다. 물관리, 차량통행도 가능한 잠수교는 부력, 유속, 수위 등을 고려해 준설배들이 다닐 수 있도록 교각과 교각사이 30m의 반인 15m를 들어올리는 안보개념의 교량으로 지어졌다.

2호선 이대역이 에스컬레이터가 깊이 나 있는 이유도 흥미롭다. 이대역이 지대가 높아 터널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5호선이 강동과 송파로 갈라진 것은, 원래 명일동쪽으로 설계했으나 방이동쪽이 소외됐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강동역에서 두 갈래로 나눠진 것이다. 6호선은 종점이 북한산 꼭대기어서 차량기지 자리가 마땅치 않자 응암역 구간이 원형의 순환선이 됐다. 이렇듯 지하철 건설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남산3호터널 공사모습. 유사시 잠수교와 남산3호터널을 연결한다.
남산 3호터널은 안보를 목적으로 만들어져 팔각정이 세워졌다.(1978년) ⓒ서울역사편찬원

다섯 번째 이야기는 이보규 전 한강관리사업소장의 회고다. 그는 서울시 예산과를 거쳐 새마을지도계장과 송파구 총무국장 등을 지냈다. 당시 서울시 예산 관련 업무의 흐름에 대해 회고했다. 그 당시 시장이나 구청장 등 기관장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바로 쓸 수 있는 가용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예산과 업무의 핵심이었다. 또 예산을 다루다 보면 보안을 지켜야 하는데 잠수교와 남산3호터널을 연결하는 전쟁대비방안이 대통령의 재가 전에 신문에 보도되어 당시 건설국장이 사표를 쓰고 그만 둔 일도 있었다.

예산편성지침이 총리실에서 나오면 각 부서를 통해 예산요구를 받는데 예산을 초과하기에 이른바 ‘대패질’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세수법정주의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무조건 세수를 늘릴 수는 없었다. 이에 증지·인세수수료 인상 외 토지등급상향 등 세외수입 확보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구술자는 강남개발과 같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나오는 체비지 수입을 당시의 대표적인 세외수입으로 뽑았다.
건설중인 제3한강교. 교각을 세우는기초 공사를 하고 있다.(1966년)
교각을 세우는 기초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3한강교의 모습(1966년) ⓒ서울역사편찬원

이책은 평소 궁금했던 경제성장기 서울시 건설 현장에서 밤낮없이 수고한 공무원들의 노고와 애환을 그들의 체험과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한 사람의 노인이 죽으면 하나의 박물관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서울시 건설현장에서 정년까지 수고하고 떠난 이들의 사명감과 자부심은 서울시의 살아있는 문헌이자 자료가 되어 서울발전사의 박물관으로 보존될 것이다.

'서울은 지금 공사중' 책자는 서울시청 지하1층 시민청내 '서울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편찬원 누리집에서 e북 열람도 가능하다.

☞서울역사편찬원
○ 서울책방 : 02-739-7033

시민기자 조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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