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시장을 만들어 점포 분양을? 시전의 탄생!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11.23. 15:30

수정일 2022.12.2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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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전시된 ‘수선총도’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전시된 ‘수선총도’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5) 한양 시장의 형성과 신해통공

서울 도심 종각역 인근에 특별한 전시관이 개관하였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바로 그곳이다. 이 전시관은 공평1·2·4지구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16세기 건물지와 길을 그대로 보존하여 전시한 도시박물관이다. 

이 전시관에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양의 도시 유적들과 함께 당시 한양 사람들의 생활과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시장의 뒷골목 풍경도 눈에 들어오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한양 시장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시전(市廛)의 형성

조선시대 종로는 한양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중심도로였다. 이 도로에서 북쪽의 경복궁과 연결된 도로가 육조거리로,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지였다. 한양으로 천도를 한 조선왕조는 도시 계획을 단행하였고, 인구가 밀집한 종로 지역에 상가를 배치하였다. 

정부에서 상가 건물을 지어주고, 상인들이 입주하여 장사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전(市廛)이라 불렀다. 자연히 종로 일대는 한양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 입점한 상인들은 독점적인 특혜를 누렸고 국가는 이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 국가 재정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행정 중심지 육조거리 모형(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행정 중심지 육조거리 모형(서울역사박물관)

태종은 1412년(태종 12)부터 1414년까지 상설 점포를 설치하여 상인들에게 분양하였다. 태종실록 1412년 2월 10일의 기록에는 “비로소 시전의 좌우 행랑(左右行廊) 8백여 간의 터를 닦았는데, 혜정교(惠政橋)에서 창덕궁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외방의 유수(游手: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 승도(僧徒)를 모아서 양식을 주어 역사시키고, 인하여 개천도감(開川都監)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였다.”고 처음 시전을 조성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점포는 혜정교(현재의 광화문 우체국 앞)에서 동대문까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종로까지, 종로에서 숭례문 구간에 설치되었다. 대략 2,000여 칸의 행랑 규모로 대대적인 공사였다. 태종은 이 지역의 민가를 철거, 거리를 정비하고 행랑을 지었다. 

행랑 일부는 관공서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주축은 점포로 분양되었다. 정부가 점포를 만들기 전에는 다양한 상품들이 뒤섞여 어지럽게 판매되었으나 행랑이 건설된 이후에는 거리 질서가 잡히고 정해진 지역에서 특정한 상품이 거래되면서 상거래가 안정을 찾았다.

이곳에서 가장 중심을 이룬 점포는 육의전(六矣廛)이었다. 비단, 무명, 명주, 모시, 종이, 어물 등 6종의 물건을 취급한다고 하여 육의전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전후에 있었던 육의전 건물들의 터와 조선 시대 시장터가 땅속에 보관되어 있던 흔적이 2003년 탑골공원 인근에서 발견되어 이곳에 육의전 박물관 건립이 추진되기도 했다. 

육의전 이외에도 종로 일대에는 쌀을 판매하는 미곡전, 철물을 판매하는 철물전, 모자를 판매하는 모자전, 잡다한 물건을 파는 잡물전 등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는 시전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시전에는 의식주에 소요되는 생필품뿐만 아니라 사치품, 기호품 등 전국에서 최고 상품들이 점차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최상품은 궁궐에 먼저 진상되었으며, 관청과 양반들이 주요 소비층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한양에는 더 많은 시전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과거 상권이 시전 상인이 주축이 된 종로 중심에서 청계천변 일대로 확대되었고, 사상(私商)의 성장과 함께 동대문 이현(梨峴, 지금의 광장시장 근처)과 남대문 칠패(七牌, 지금의 서울역 뒤편) 등지에도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2. 정조가 신해통공을 단행한 까닭?

조선후기 전국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사람들 중 다수는 생계를 위해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물건을 이고 지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 일정한 장소에 좌판을 벌여서 파는 좌고 등의 형태를 띠면서 점차 난전(亂廛)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禁亂廛權) 때문에 도성 안에서 장사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도성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금난전권’은 ‘난전을 금하는 권리’라 하여, 시전 상인들이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가로 상품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하는 권리였다. 육의전을 포함한 주요 시전들이 관청 물품을 공급하거나 중국에 보내는 공물을 부담하는 등의 국역을 지는 대신에, 도성 안과 성 밖 10리 안에서 자신들이 취급하는 상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조선시대 상인 모형(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상인 모형(서울역사박물관)

그러나 금난전권은 조선후기 상업의 성장과 시장의 발달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제약을 가하는 문제점을 소지하고 있었다. 당시 시장의 변화상을 주시하고 있던 개혁군주 정조는 1791년 1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는 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하였다. 1791년이 신해년이고, 통공이란 ‘양쪽을 모두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특권 상인에 의한 독과점 행위를 폐지하는 조치를 일컫는다. 

시전 상인들에게만 주어졌던 오랜 특권인 금난전권이 폐지됨으로써 소상인들의 입지는 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육의전에 대한 금난전권을 지속시킨 것은 국역을 시전 상인들에게 계속 부담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재정 상황 때문이었다.

신해통공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건의를 반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채제공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항상 측근에서 보필해 온 인물로, 노론 중심의 정국에서 소외를 받고 있던 남인들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정조는 개혁파 대신 채제공을 중용하였고, 채제공은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노론 권력가와 시전 상인의 정경유착 고리를 끊어 나간 것이다. 신해통공에서 입법한 내용은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었다. 『정조실록』1791년(정조 15) 1월 15일의 기록에는 신해통공을 추진한 배경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 장사(都賈)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의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六廛)이 위로 국역(國役)을 응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를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
이에 제각기 가게를 벌여 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는데, 평민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부득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한 사람은 그 가게를 버리고서는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 값이 나날이 올라 물건 값이 비싸기가 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3배 또는 5배나 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채제공은 우선 시전 상인이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이 곤궁해지는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육전이 '국역에 응하면서 이익을 독점한다.'고 파악한 것은 마치 현대사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던 정경유착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한다.'는 지적은 현재 대기업의 문어발식 업무 확장이 중소기업을 어렵게 하는 상황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채제공은 또한 '육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좌법(反坐法: 거짓으로 죄를 씌운 자에게 그 씌운 죄에 해당하는 벌을 줌)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고 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상인들이 보다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정조 시대에 단행한 신해통공으로 인하여 조선의 시장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그만큼 국가의 경제 규모도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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