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을 의미하는 음식 '탕평채'에 깃든 영조의 마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7.20. 14:28

수정일 2022.07.20. 16:27

조회 3,299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섞어 만든 탕평채, '탕평채'는 영조가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등장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섞어 만든 탕평채, '탕평채'는 영조가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등장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8) 영조의 탕평책과 균역법

조선의 왕 중에서 83세로 가장 장수하고, 52년이라는 가장 긴 재위기간 기록을 보유한 왕은 영조(英祖:1694~1776, 재위 1724~1776)이다. 영조 하면 ‘사도’라는 영화에서도 언급이 되었듯이 아들 사도세자와를 죽인 비정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탕평책이나 균역법과 같이 조선을 대표하는 정책을 수립한 왕으로 기억이 되고 있다. 그리고 탕평책과 균역법을 구현한 공간들도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탕평책의 추진과 탕평비

영조는 1724년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당쟁의 격려함을 보여주는 경종 대의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소용돌이를 직접 체험하였다. 왕이 된 영조는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국정의 최우선으로 모든 당파가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할 것을 천명하였다.  탕평에 대한 영조의 강한 의지는 1727년(영조 3) 7월 4일에 내린 붕당의 폐단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할 것을 선언한 아래의 하교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교하기를, “아! 모든 신민은 모두 내 가르침을 들으라. 붕당(朋黨)의 폐해가 ?가례원류?가 나온 뒤부터 점점 더하여 각각 원수를 이루어서 죽이려는 것으로 한계를 삼아왔다. 아! 마음 아프다. 지난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의 일은 그 가운데 반역할 마음을 품은 자가 있기는 하나 다만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뿐이지, 어찌하여 반드시 한편 사람을 다 죽인 뒤에야 왕법을 펼 수 있겠는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경중을 가리지 않아서 한편 사람들이 점점 불평하게 하는 것은 이 또한 당습(黨習)이다. ...  당습의 폐단이 어찌하여 이미 뼈가 된 세 신하에게까지 미치는가? 무변(武弁)·음관(蔭官)이 색목(色目)에 어찌 관계되며 이서(吏胥)까지도 붕당에 어찌 관계되기에 조정의 진퇴가 이들에게까지 미치는가? 이미 반포하고 알렸어도 전만 못하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강력히 지적한 뒤에, “나는 다만 마땅히 인재를 취하여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을 보내어 국도(國都)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면서 공평하게 인재를 쓸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어서 “나의 마음이 이러한 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당파를 초월하여 모든 신하들이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과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엄한 처벌을 내릴 것을 하였다.

탕평이라는 말은 유교 경전인 「서경」의 홍범(洪範) 황극설(皇極說)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편무당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平平)’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575년 선조 대 최초의 분당인 동서분당이 이루어지고, 이후 동인 내의 남인과 북인, 서인 내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지만, 이를 억제하는 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영조는 탕평책을 국시로 내세우고 이를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 온건파 인사, 당시 용어로는 완론(緩論)을 등용하였다. 즉 노론 강경파 준로(峻老)와 소론 강경파 준소(峻少)를 권력에서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론(緩老)과 완소(緩少)를 중용하는 방식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신하, 즉 탕평파 대신들을 양성하여 정국의 중심에 나서게 했다.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 대신들로서 이들은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의 든든한 후원군이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앞에 위치한 ‘탕평비’
성균관대학교 앞에 위치한 ‘탕평비’

영조의 탕평책이 구현된 대표적인 공간은 현재 성균관 대학교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탕평비(蕩平碑)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 영조가 탕평비를 건립한 것은 앞으로 관료가 될 성균관 유생부터 당습(黨習)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성균관은 오늘날의 대학교로 인식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과거의 1차 시험인 소과에 합격한 생원이나 진사가 최종 시험인 문과(대과) 시험을 준비하는 기관이었다.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군자지공심(周而不比 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소인지사의(比而不周 小人之私意)’이라 하여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지음은 소인의 사심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탕평과 편당에 두면서 ‘탕평’이 공(公)이자 바른 것임을 선언한 영조의 의지가 보인다. 

청포묵(백)에 소고기볶음(적)과 미나리(청), 김(흑) 등을 섞어 만든 ‘탕평채’가 영조 때 여러 당파가 잘 협력하자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황필수(1842-1914)가 각종 사물의 명칭을 고증하여 1870년에 펴낸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섞어 만든 음식이 ‘탕평채(蕩平菜)’인데, 이는 사색당파의 치우침 없는 탕평에서 음식명이 유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민 군주’ 영조

영조가 1년에 2필을 내는 군포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주는 획기적인 정책인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데는 백성들과 자주 소통하며, 민원(民怨)을 정확히 파악해 나간 안목이 있었다. 영조가 어느 왕보다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파악한 데는 스스로가 서민의 삶을 살아간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慈殿:왕의 어머니)께서는 늘 염려를 하셨고, 영빈(寧嬪:숙종의 후궁)도 매양 경계하기를,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고 한 『영조실록』의 기록은 서민 군주 영조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조는 자신이 병이 없는 것도 평소에 거친 음식을 먹고 얇은 옷으로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검소한 식단과 간편한 옷을 주로 입었다. 영조가 보양식으로 고추장을 좋아했음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보인다. 영조는 의관들에게 원기를 보충할 수 있는 음식을 추천했고, 방태여가 “고추장이 비위를 도우는데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답한 기록이 보인다. 영조 때의 고추장은 고초장(苦椒醬, 枯椒醬), 초장(椒醬), 호초장(胡椒醬)으로 다양하게 불리었다. 순창 사람 조종부의 초장과 호초장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순창 고추장은 영조 대에도 선호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가 숙종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18세부터 28세까지 궁궐이 아닌 사가(私家)에서 살았다.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까? 영조는 왕이 된 이후에도 철저하게 사치를 방지했고, 군역의 부담을 덜어 준 균역법(均役法)의 실시에는 이러한 경험이 큰 작용을 하였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

홍화문 앞에서 실시한 균역법 여론조사

탕평책과 함께 영조가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이 균역법이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은 토지에 대한 세금인 전세(田稅)와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 군역을 직접 지는 대신 옷감을 바치는 군포(軍布)가 있었다. 조선시대 양인(良人)들은 16세에서 60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졌지만, 양반은 군역을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관직을 사거나 족보와 호적의 위조로 군역의 법망에서 벗어났다. 

양인 중에는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군역을 피한 양반과 노비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군역을 지는 백성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당시 군역이 50만 호에 해당한다고 추정되는데 실질적으로 군역의 부담을 지는 숫자는 10만 호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정부에서는 죽은 사람(백골징포)이나, 어린아이(황구첨정)에게까지 군역이 부과되었다. 군역 부담으로 도망간 경우에는 이웃(인징)이나 친척(족징)에게 군역을 부담시켰다. 18세기에 들어와 군역은 일반 백성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세금이 되었고, 현실을 간파한 영조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으면서 군역 문제 해결에 나섰다.  

1750년(영조 26) 5월 19일 영조는 창경궁의 홍화문 앞에 나갔다. 군역의 부담에 대한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영조는 “아 이번에 궐문에 임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한 연유에서이다. 우리 사서(士庶)들은 모두 이 하유(下諭)를 들으라. 생각해 보면, 지금의 민폐는 양역 같음이 없으니, 지금에 이르러 고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게 했다. 1750년 7월 3일 영조는 다시 홍화문 앞에 나타났다. 양역의 편리 여부를 묻고 신하들과 사서(士庶) 및 백성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표하였다. 

이어서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였는데, 이봉령은 “호포와 결포가 모두 폐단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역질이 요(堯) 임금 때의 홍수와 탕(湯) 임금 때의 가뭄 같으니 성상께서는 의당 애처로운 마음으로 더 돌보아야 하는데, 도리어 나라의 백성을 전에 없던 새로운 역(役)으로 바로 몰아넣고 계십니다.”고 하면서 강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가 백성과 유생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민주정치와 비추어보아도 손색이 없다.

균역법 추진에는 경제 분야에 해박한 관료인 박문수, 조현명, 홍계희, 신만 등의 도움도 컸다.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는 호조판서로서 균역법의 기본인 감필(減匹) 정책을 제안했다. 영조는 여론 조사와 관료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1751년 9월 균역청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핵심 내용은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2개월에 1필로 납부하는 것이었다. 

한집에 장정이 3~4명이 있을 경우 군포 1필의 값을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냥 정도가 되었는데, 당시 1냥으로 쌀 20kg(현재 5만 원) 정도를 구매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현재로 환산하면 20냥은 100만 원 정도로,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균역법은 이것을 반으로 줄이는 획기적인 조치였기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검소와 절약을 바탕으로 스스로 서민적인 삶을 실천했던 영조. 영조의 균역법은 충분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실시했다는 점과, 서민 위주 정책 이념이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창경궁에서 주로 거처했던 영조는 정문인 홍화문을 백성들의 여론을 듣는 창구로 활용했다. 그리고 창경궁 인근의 성균관에는 탕평비를 세워 탕평책을 실천해 나갔다. 영조의 정책이 구현된 공간들을 찾아보면서, 정파의 분열을 막고 백성과 소통하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영조를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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