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를 세계에 알린 앨버트 W. 테일러의 집을 찾다

시민기자 박칠성

발행일 2022.03.14. 09:40

수정일 2022.03.14. 14:20

조회 1,933

붉은 벽돌집 딜쿠샤 전경
붉은 벽돌집 딜쿠샤 전경 ©박칠성

3·1만세운동을 세계에 알린 앨버트 W. 테일러가 살아 온 '딜쿠샤(Dilkusha)'를 방문했다. 방문 전 미리 서울특별시 공공서비스예약을 통해 예약 신청을 해놓았는데 별도의 입장료는 없었다. 건물 외관은 붉은 벽돌집으로 이국적인 건물이었고, 내부도 서양식 스타일로 마치 외국에 온 듯했다. 

이 집의 이름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으로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 당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 집은 1923년 준공에 착수하여 1924년에 완공했고, 1926년 벼락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1930년에 재건되었다고 안내해설사가 설명해 주었다.  

안내해설사는 먼저 3·1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세계만방에 알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앨버트의 부인 메리가 쓴 회고록 <호박 목걸이>에 의하면 1919년 2월 28일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앨버트 W. 테일러는 본래  광산업 및 무역업자로 이 시기 연합통신(AP, Associated Press)으로부터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이 때부터 그는 언론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앨버트는 3월 1일에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아들을 낳아 입원하고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침대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활동을 조명한 영상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활동을 조명한 영상 ©박칠성
1919년 3월 13일 뉴욕 타임즈에 실린 기사 제목
1919년 3월 13일 뉴욕 타임즈에 실린 기사 제목 ©박칠성

한국어에 능통했던 앨버트는 이것이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아챘고, 즉시 관련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월리엄에게 전달하였다. 월리엄은 이것들을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져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 그 기사는 1919년 3월 13일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다음과 같은 제목이 실렸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조선인의 독립 선언)" 
Thousands Who Engage in Demonstration Are Arrested by the Japanese(시위에 참가한 수천 명이 일본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앨버트가 연합통신에 전달한 독립선언서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다고 한다.
전시실로 꾸며진 1층 거실
전시실로 꾸며진 1층 거실 ©박칠성

방문한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1층은 현관으로 연결된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식당과 주방이, 서쪽에는 자녀나 손님을 위한 방들이 있다.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여는 공간이었고, 벽면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으며 벽난로와 대형난로가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도 달려 있었는데 안내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집을 돌보는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했다.
테일러 부부의 수집 애장품을 볼 수 있는 2층 거실을 관람하는 시민들
테일러 부부의 수집 애장품을 볼 수 있는 2층 거실을 관람하는 시민들 ©박칠성
겨울 추위를 대비해 여러 방에 설치한 벽난로 모습
겨울 추위를 대비해 여러 방에 설치한 벽난로 모습 ©박칠성

2층은 전망이 뛰어난 거실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앨버트W. 테일러의 서재와 침실이, 서쪽에는 메리 L. 테일러의 작업실과 침실이 있었다.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으로 전망이 좋았다. 개방적 베란다는 여름 더위를 대비하여 통풍을 고려한 것이고,겨울 추위를 대비해 채광을 위한 넓은 창문과 거실 등 여러 방에 설치된 벽난로도 보였다.
건물복원 과정을 조명한 영상
건물복원 과정을 조명한 영상 ©박칠성

이어 딜쿠샤 건물 복원과 전시실 마련에 관한 안내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서울시는 원형복원을 위해 2016년 서울시,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2017년 8월에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을 등록하고 2018년 7월에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과 원만히 합의하여 이주를 완료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딜쿠샤를 전시관으로 복원하기 위한 학술연구와 설계용역을 실시하였다. 2018년 11월에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2020년 12월에 완료하여 2021년 3월에 전시실로 개관했다.
서울시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 의뢰해 재현한 자수화조도 병풍
서울시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 의뢰해 재현한 자수화조도 병풍 ©박칠성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활동 전시품을 관람하는 시민들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활동 전시품을 관람하는 시민들 ©박칠성

거실은 테일러 부부 거주 당시의 모습을 고증을 통해 재현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 부부 가족이 쓰던 물품은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만들어진 고가구들을 구해 들여 놓았다. 주칠원반, 자수화조도 병풍 등 당시 집에 있던 물품은 서울시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 의뢰해 제작했다고 한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묻힌 앨버트  테일러 묘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묻힌 앨버트 테일러 묘비 ©박칠성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엘버트 W.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 L.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테일러 부부는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하였다. 일제가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지 6년만이었다. 마음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항상 바랐던 엘버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묻혔고, 메리는 한국을 떠나가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했다. 20여 분의 안내해설사의 설명이 끝나고 40분 동안 자유 관람을 실시하였다. 

일제강점기 시대 우리나라를 위해 활동한 집주인 이야기와 100여 년 전 조선에서 생활한 서양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딜쿠샤 건물 공간 또한 흥미로웠다. 관심 있는 시민들 많이 방문하시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딜쿠샤 이용 안내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 예약방법 :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 예약시간 : 오전 10시~11시, 오후 1시 30분~2시 30분, 오후 3시~4시, 오후 4시30분~5시 30분
○ 휴무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 관람료 : 무료
○ 문의 : 서울역사박물관(070-4126-8853)

시민기자 박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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