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를 바꾼 '인조반정' 흔적을 찾아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1.12. 15:07

수정일 2022.01.12. 15:08

조회 15,942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서울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세검정
서울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세검정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6) ‘인조반정’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

조선에서는 왕을 몰아내는 반정(反正)이 두 차례 일어났다.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두 번 있었던 반정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왕이 된 인물의 반정 참여 유무이다. 중종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추대의 형식으로 왕이 되었고, 인조는 왕이 되기 전 능양군(綾陽君)의 신분으로 반정 세력과 교감하면서 직접 반정에 참여했다. 인조반정의 역사적 공간들을 쫓아가 보기로 한다.

1. 세검정과 홍제천

1623년 3월 13일 삼경(밤 12시) 무렵 일군의 군사들이 홍제원(弘濟院) 근처로 집결하였다. 반정의 주도세력은 이귀, 김류, 최명길, 이시백, 장유, 심기원, 김자점, 이괄 등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서인으로서, 광해군 시절 집권 세력인 대북(大北)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당일 인조는 연서역(延曙驛:현재의 은평구 역촌동)에서 친위 부대를 이끌고 이서(李曙)의 부대를 맞으면서, 반정에 직접 참여하였다. 

인조가 반정에 직접 참여한 데에는 광해군과의 악연이 컸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으로, 동생 능창군이 신경희의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자진(自盡)하였고, 정원군은 홧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류, 이귀 등 반정의 주체 세력은 세검정과 한양의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을 지나, 바로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을 공격하였다. 광해군에게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등을 돌린 까닭에 반정은 쉽게 성공하였다.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가 성리학의 윤리에 어긋났다는 것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명의 적대국 후금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이 인왕산 자락에 경덕궁(慶德宮)과 더불어 인경궁(仁慶宮)을 조성하는 등 무리한 토목 사업을 추진한 것도 민심에서 멀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반정 세력이 홍제원에서 세검정으로 들어왔음은 『궁궐지(宮闕志)』의 “세검정은 창의문 밖 탕춘대에 있다. 계해(癸亥: 1623년)의 인조반정 때 창의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세검정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홍제천(弘濟川)’이라는 지명은 근처에 있던 홍제원(弘濟院)에서 유래하였다. 홍제원은 조선 시대 빈민 구제기구이자 중국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었다. 홍제천은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으로도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홍제원에 이르면 모래가 많이 퇴적되어 있어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이 일대는 경치가 빼어났는데, 연산군은 이곳에 탕춘대(蕩春臺)를 세워 놀이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도성과 북한산성의 중간 지대로써 도성의 북방 요충지이기도 했다. 숙종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쌓았고, 영조 대에는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탕춘대는 총융청이 오면서, 군사를 훈련시킨다는 뜻의 ‘연융대’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군사 요충지가 들어서면서 군사들을 위한 휴식 장소도 필요했다. 이에 영조가 정자를 짓고 ‘세검정’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세검정에 대해서는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고, 연산군 때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는 전해오는데, 영조 때인 1748년(영조 24)에 고쳐 지은 것은 확실하다. 세검정의 모습은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세검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정선의 그림은 1977년 세검정 복원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2. 창덕궁에서 맞이한 광해군의 최후

반정군들은 3월 13일 밤 12시경 창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갔고,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자,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고 『인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정군에 포섭한 것도 반정 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고,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金虎門)은 수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맞았다.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도끼로 찍어 열고 들어간 후, 쌓아둔 장작더미에 불을 질러 궁궐의 불빛이 성안을 환하게 밝혔다. 반정군들은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궁중에 불이 일어나지 않거든 모두 자살하라.”는 말을 미리 해 두었다고 한다.

반정군의 공격에 놀란 광해군은 황급하게 내시의 등에 업힌 후 북문 담을 넘어 궁궐을 빠져 나왔다. 자신이 총애하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한 후, 안국신이 상중에 입던 흰 옷과 짚신 차림으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의관 정남수의 고변으로 바로 체포되었고, 광해군은 도총부로 끌려 왔다. 왕비 유씨는 궁녀들과 함께 후원의 어수당에 숨어 있다가 반정군들에게 체포되었다. 폐세자(廢世子) 역시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은, 서궁(西宮: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어른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셔와 인조의 즉위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처음에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광해군이 병사를 보내어 변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의심하여 문을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이귀 등이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모두 아뢴 후에 인목비에게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다. 

이귀와 홍서봉의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였지만 인목대비는 조건을 걸었다. “죄인(광해)의 부자와 이이첨 부자와 여러 흉당들의 목을 잘라 모두 달아맨 후에야 궁에서 나가겠다.”고 한 것이다. 이귀는 “죄인의 부자는 임금으로 있었으니 쉽사리 처치할 수 없고, 이이첨의 무리는 방금 군사를 풀어 잡아 오면 마땅히 여쭈어 명을 받들어서 처단하겠다.”고 대비를 달랬다. 그래도 인목대비는 노여움을 풀지 않았고, 이귀는 아들 이시백을 보내어 인조가 친히 와서 대비를 뵐 것을 청했다.
덕수궁(경운궁) 즉조당
덕수궁(경운궁) 즉조당

3. 경운궁에서 전해진 옥새

반정 성공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인조는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신료들이 가마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말을 타고 갔다. 도성 백성들 중에는 환호성을 울리면서 “오늘날 다시 성세를 볼 줄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인조는 경운궁에 도착한 후 말에서 내려, 인목대비 앞에 엎드려 대죄하였다. 신하들은 속히 어보(御寶:옥새)를 전해 줄 것을 청하였고, 인목대비는 마침내 인조에게 어보를 전하였다. 조선 역사상 두 번째의 반정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어보를 전달한 뒤에도,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 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고 한 것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해 복수를 해 주는 것이 인조가 자신에게 효(孝)를 행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반정 세력들은 어보를 전달받은 직후 즉위식도 바로 거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인목대비는 “별당(경운궁 즉조당)은 선왕께서 일을 보시던 곳이라 이미 궁인으로 하여금 청소를 하게 하였다.”하고, 인조가 별당에서 즉위식을 올리도록 하였다.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경운궁은 광해군에 이어서 인조가 연이어 즉위식을 올린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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