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나라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조선의 여왕' 문정왕후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11.24. 15:11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봉은사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2) 문정왕후와 봉은사
현재 서울 강남의 중심지에 봉은사(奉恩寺)가 자리를 잡고 있다. 유교 이념이 국시(國是)였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대규모 사찰이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명종(明宗:1534~1567, 재위 1544~1567)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였다. 20년 전 ‘여인천하’라는 드라마를 통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여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문정왕후와 봉은사의 깊은 인연을 소개한다.
1. 봉은사의 모태, 견성사
봉은사는 신라시대의 승려 연회(緣會) 국사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진지왕(眞智王)의 추복을 위해 처음 건립되었고, 혜공왕 대에 본격적으로 사찰 조성을 시작하여 원성왕 대에 완성되었음이 각종 자료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사료에 봉은사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부인과 관련이 있다. 1444년 광평대군은 20세의 나이로 창진(瘡疹)에 걸려 요절하였고, 그의 무덤은 현재 강남구 삼성동 인근에 처음 조성되었다. 광평대군과의 사이에 6개월 된 아들 영순군을 두었던 대군의 부인은 비구니 혜원(慧園)이 되었다. 혜원은 남편의 무덤 근처에 있던 견성암이라는 암자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이것이 봉은사의 모태가 되었다. 숭유억불을 기조로 하는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원찰(願刹)을 세우는 것은 허용했다. 세조의 광릉 옆에 세운 봉선사(奉先寺)가 대표적이다. 이후 광평대군의 무덤은 태조의 6남 방번의 무덤이 있는 대모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광평대군은 생전에 세종으로부터 방번의 양자가 될 것을 명받았고, 이를 사후에 실천한 것이었다. 현재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 자락에 있는 광평대군 묘역에 무안대군 방번 부부와 광평대군 부부, 영순군 부부 묘를 비롯하여 광평대군 후손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광평대군의 묘역을 옮긴 이후에도 견성암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고, 어느 시점에 견성사(見性寺)가 되었다.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원찰로 견성사를 삼은 것도 힘을 실어주었다. 『연산군일기』에는 견성사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1495년(연산군 1) 홍문관 부제학 박처륜(朴處綸)은 “신도(神道)는 고요함을 주로 한다고 하는데, 지금 견성사가 능 곁에 있어 중들이 불경 외는 소리와 새벽 종소리 저녘 북소리가 능침을 소란하게 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성종대왕의 신령이 어찌 심한 근심이 없으시겠습니까.”라면서 견성사의 폐지 또는 이전을 주장하였다. 홍문관 전한 이수공(李守恭)은 견성사가 고찰이기는 하지만, 능침 안에 높다랗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아침 종과 저녁 북이 원침(園寢)을 진동하는 것도 역시 고요함을 숭상하는 도가 아닌데, 연산군이 대비인 정현왕후의 명으로 새 절을 창건하려 하는 것은 성종의 뜻을 위배하여 불효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견상사의 중창 문제로 사간원과 사헌부들이 공사 중지를 청하는 상고가 올라왔지만, 연산군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홍문관 부제학 유빈(柳濱) 등은 “지금 강제로 불당을 짓는 것은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기술하는 본의가 아니오니, 청컨대 빨리 정지하도록 할 것”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499년(연산군 5) 12월 12일의 기록에는 연산군이 전교하여,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도 사사(寺社)에서 세금을 거둔 것과 세납한 소금을 옮겨 주라.”고 한 기록도 있다. 1449년 어느 시점에서 견성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봉은사에 봉선사의 전례를 따라 왕의 사패지를 준 것은 자순대비(정현왕후)의 명에 의한 것이요, 나의 본디의 뜻은 아니다.”고 하면서, 봉은사의 중창과 지원에 대비인 정현왕후의 뜻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연산군일기』의 기록을 통해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대비의 뜻이라며 봉은사를 중창하고 경제적 지원도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료에 봉은사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부인과 관련이 있다. 1444년 광평대군은 20세의 나이로 창진(瘡疹)에 걸려 요절하였고, 그의 무덤은 현재 강남구 삼성동 인근에 처음 조성되었다. 광평대군과의 사이에 6개월 된 아들 영순군을 두었던 대군의 부인은 비구니 혜원(慧園)이 되었다. 혜원은 남편의 무덤 근처에 있던 견성암이라는 암자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이것이 봉은사의 모태가 되었다. 숭유억불을 기조로 하는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원찰(願刹)을 세우는 것은 허용했다. 세조의 광릉 옆에 세운 봉선사(奉先寺)가 대표적이다. 이후 광평대군의 무덤은 태조의 6남 방번의 무덤이 있는 대모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광평대군은 생전에 세종으로부터 방번의 양자가 될 것을 명받았고, 이를 사후에 실천한 것이었다. 현재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 자락에 있는 광평대군 묘역에 무안대군 방번 부부와 광평대군 부부, 영순군 부부 묘를 비롯하여 광평대군 후손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광평대군의 묘역을 옮긴 이후에도 견성암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고, 어느 시점에 견성사(見性寺)가 되었다.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원찰로 견성사를 삼은 것도 힘을 실어주었다. 『연산군일기』에는 견성사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1495년(연산군 1) 홍문관 부제학 박처륜(朴處綸)은 “신도(神道)는 고요함을 주로 한다고 하는데, 지금 견성사가 능 곁에 있어 중들이 불경 외는 소리와 새벽 종소리 저녘 북소리가 능침을 소란하게 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성종대왕의 신령이 어찌 심한 근심이 없으시겠습니까.”라면서 견성사의 폐지 또는 이전을 주장하였다. 홍문관 전한 이수공(李守恭)은 견성사가 고찰이기는 하지만, 능침 안에 높다랗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아침 종과 저녁 북이 원침(園寢)을 진동하는 것도 역시 고요함을 숭상하는 도가 아닌데, 연산군이 대비인 정현왕후의 명으로 새 절을 창건하려 하는 것은 성종의 뜻을 위배하여 불효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견상사의 중창 문제로 사간원과 사헌부들이 공사 중지를 청하는 상고가 올라왔지만, 연산군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홍문관 부제학 유빈(柳濱) 등은 “지금 강제로 불당을 짓는 것은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기술하는 본의가 아니오니, 청컨대 빨리 정지하도록 할 것”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499년(연산군 5) 12월 12일의 기록에는 연산군이 전교하여,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도 사사(寺社)에서 세금을 거둔 것과 세납한 소금을 옮겨 주라.”고 한 기록도 있다. 1449년 어느 시점에서 견성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봉은사에 봉선사의 전례를 따라 왕의 사패지를 준 것은 자순대비(정현왕후)의 명에 의한 것이요, 나의 본디의 뜻은 아니다.”고 하면서, 봉은사의 중창과 지원에 대비인 정현왕후의 뜻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연산군일기』의 기록을 통해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대비의 뜻이라며 봉은사를 중창하고 경제적 지원도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오색연등으로 빼곡히 채워진 봉은사 대웅전 앞
2. 문정왕후와 봉은사
봉은사는 문정왕후의 불교중흥 정책과 더불어 당시를 대표하는 사찰로 거듭나게 된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봉은사의 주지로 삼으면서 이러한 의지를 본격화해 나갔다. 승과의 부활, 선교 양종의 복설 및 양종도회소를 다시 설치했다. 봉은사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지정되어 전국의 선종 사찰을 통솔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승려를 선발하는 시험인 승과가 시행된 곳도 봉은사였다.
1550년(명종 5) 12월 5일의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가 선종과 교종의 복립(復立)을 명한 기록이 보인다. 문정왕후는 비망기에서, “조종조의 『대전(大典)』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중이 되는 길을 막고자 함이었는데, 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다.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대전』에 따라 대선취재조(大禪取才條) 및 승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밝히어 거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명종은 1551년 4월 13일 전교를 내려, “승려 보우를 봉은사의 주지로 삼은 것은 봉은사가 성종의 능침인 선릉을 수호하는 사찰로 그 중요성이 크다.”라고 하면서, 유생들이 자신에게 보우를 높인다고 하는 것은 근거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기도 하였다. 봉은사는 원래 고양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옮기기 전부터, 문정왕후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사찰이었고, 1562년 정릉이 선릉 근처로 오면서 그 위상이 더욱 커졌다. “이번에 능을 옮기자는 의논은 성렬대비(聖烈大妃:문정왕후)의 뜻이었으니 대개 장경왕후와 같은 경내에서 무덤을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 요승 보우가 은밀히 그 계획을 도와 지리를 아는 중을 시켜 봉은사 곁에 자리를 정하게 했으니, 이는 보우가 이 사찰에 주지로 있으면서 저들의 소굴을 튼튼히 하려고 한 짓이다.”는 『명종실록』의 기록은 보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릉의 천릉이 봉은사의 위상 강화에 큰 힘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550년(명종 5) 12월 5일의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가 선종과 교종의 복립(復立)을 명한 기록이 보인다. 문정왕후는 비망기에서, “조종조의 『대전(大典)』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중이 되는 길을 막고자 함이었는데, 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다.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대전』에 따라 대선취재조(大禪取才條) 및 승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밝히어 거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명종은 1551년 4월 13일 전교를 내려, “승려 보우를 봉은사의 주지로 삼은 것은 봉은사가 성종의 능침인 선릉을 수호하는 사찰로 그 중요성이 크다.”라고 하면서, 유생들이 자신에게 보우를 높인다고 하는 것은 근거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기도 하였다. 봉은사는 원래 고양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옮기기 전부터, 문정왕후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사찰이었고, 1562년 정릉이 선릉 근처로 오면서 그 위상이 더욱 커졌다. “이번에 능을 옮기자는 의논은 성렬대비(聖烈大妃:문정왕후)의 뜻이었으니 대개 장경왕후와 같은 경내에서 무덤을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 요승 보우가 은밀히 그 계획을 도와 지리를 아는 중을 시켜 봉은사 곁에 자리를 정하게 했으니, 이는 보우가 이 사찰에 주지로 있으면서 저들의 소굴을 튼튼히 하려고 한 짓이다.”는 『명종실록』의 기록은 보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릉의 천릉이 봉은사의 위상 강화에 큰 힘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