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성큼,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독서휴가 제도가 있었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09.01. 14:30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 성종, 용산에 독서당을 건립하다
조선시대 관리들에게도 휴가 제도가 있었을까? 휴가가 있었음은 물론이고, 그것도 유급 휴가였다. 세종이 장기근속한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사가독서 제도는 현재 관공서나 대학교, 기업체 등에서 실시되는 장기연수 또는 연구년 제도와 유사하다. 세종 때는 집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하였다가, 좀 더 시설을 갖춘 북한산 진관사에서 휴가를 보내도록 했는데, 성종은 아예 사가독서를 지원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독서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처음 건립된 곳은 서울의 용산 지역이었다.
성종은 세종 때의 사가독서 제도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인 ‘독서당’을 조성하였다. 실록에서 경연을 가장 많이 한 왕이 성종인 것은 이러한 모습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전기 왕 중에서 세종처럼 학문을 즐기고, 신하들과 공부하고 의견 교환하는 것을 좋아한 왕으로는 성종을 꼽을 수 있다.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불렸는데, 성종은 처음 용산 지역에 독서당을 설치하고 이를 ‘남호(南湖)’라고 칭하였다. 용산에 설치되었던 독서당은 중종 때에 와서 한강의 동호 근처인 지금의 금호동, 옥수당 쪽으로 옮겨져, 동호 독서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호대교’의 명칭은 이 근처에 독서당이 있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종 때 처음 독서당을 지은 동기에 대해서는 조위(曺偉:1454~1503)가 쓴 「독서당기」를 통해 알 수가 있다. 첫 부분을 보자.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경남(梗楠:가시나무와 녹나무)과 기재(杞梓:소태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몇 십 백 년을 길러서 반드시 공중에 닿고 구렁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棟梁)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驊騮: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와 녹이(騄駬:목왕이 타던 팔준마 중 하나)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그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 나라와 초나라의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미리 어진 재주를 기르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리요. 이것이 곧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위의 기록에는 성종 때 독서당을 설치한 유래와 그 취지가 잘 밝혀져 있다. 재목을 미리 심어두어야 집을 짓고 말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처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린 인재들을 잘 길러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독서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1492년(성종 23) 조성한 독서당은 한강 북쪽 언덕에 있었던 용산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만든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폐사된 곳이 많았는데, 독서당 역시 폐사 자리에 들어선 것이었다. 성종 시대에 본격적인 독서당 시대가 열렸음은 『연려실기술』 「성종조고사본말」에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 양희지(楊熙止), 유호인(兪好仁), 조위(曹偉), 허침(許琛), 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후에 용산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을 올렸다.”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독서당은 학문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연산군 대에 와서 수난을 당했다.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의 여파로 다시 사라졌다가 중종 때 부활하였다. 1517년(중종 12)에 중종은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였는데, 중종 때의 독서당은 성종 때의 남호독서당과 구분하여 동호독서당이라 한다. 성종이 수정배(水精杯)를, 중종이 선도배(仙桃杯)를 독서당 학자들에게 하사한 기록도 보인다. 독서당의 변천 과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독서당은 옛날에 용산에 폐지한 절간이 강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고쳐서 짓고 당(堂)을 만들어서 홍문관의 연소한 학자들의 글 읽는 곳을 만들었다. 연산군 때에 혁파하고 당은 궁인(宮人)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10년에 다시 독서당을 옛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는데, 여염집 사이여서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다시 좋은 자리를 두모포 남쪽 언덕 월송암(月松庵) 서쪽 산기슭을 선택하여 창건하였으며, 호당이라고 이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
「독서당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위는 “성인의 도리는 모두 서책 중에 퍼져 있다. 6경(經)의 깊은 뜻과, 여러 사기(史記)의 다르고 같음과, 백가서(百家書)의 넓고 많음을 반드시 다 거두고 넓게 찾아내어, 그 흐름을 지나서 정밀한 것을 모으고 그 모임을 보아서 요긴한 것을 찾으며, 그 넓은 것을 다하여 요약한 데로 돌아오게 한 후에야 깊이 나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독서의 중요성을 그만큼 강조한 것이다. 이제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서서히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성종은 세종 때의 사가독서 제도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인 ‘독서당’을 조성하였다. 실록에서 경연을 가장 많이 한 왕이 성종인 것은 이러한 모습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전기 왕 중에서 세종처럼 학문을 즐기고, 신하들과 공부하고 의견 교환하는 것을 좋아한 왕으로는 성종을 꼽을 수 있다.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불렸는데, 성종은 처음 용산 지역에 독서당을 설치하고 이를 ‘남호(南湖)’라고 칭하였다. 용산에 설치되었던 독서당은 중종 때에 와서 한강의 동호 근처인 지금의 금호동, 옥수당 쪽으로 옮겨져, 동호 독서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호대교’의 명칭은 이 근처에 독서당이 있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종 때 처음 독서당을 지은 동기에 대해서는 조위(曺偉:1454~1503)가 쓴 「독서당기」를 통해 알 수가 있다. 첫 부분을 보자.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경남(梗楠:가시나무와 녹나무)과 기재(杞梓:소태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몇 십 백 년을 길러서 반드시 공중에 닿고 구렁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棟梁)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驊騮: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와 녹이(騄駬:목왕이 타던 팔준마 중 하나)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그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 나라와 초나라의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미리 어진 재주를 기르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리요. 이것이 곧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위의 기록에는 성종 때 독서당을 설치한 유래와 그 취지가 잘 밝혀져 있다. 재목을 미리 심어두어야 집을 짓고 말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처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린 인재들을 잘 길러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독서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1492년(성종 23) 조성한 독서당은 한강 북쪽 언덕에 있었던 용산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만든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폐사된 곳이 많았는데, 독서당 역시 폐사 자리에 들어선 것이었다. 성종 시대에 본격적인 독서당 시대가 열렸음은 『연려실기술』 「성종조고사본말」에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 양희지(楊熙止), 유호인(兪好仁), 조위(曹偉), 허침(許琛), 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후에 용산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을 올렸다.”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독서당은 학문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연산군 대에 와서 수난을 당했다.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의 여파로 다시 사라졌다가 중종 때 부활하였다. 1517년(중종 12)에 중종은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였는데, 중종 때의 독서당은 성종 때의 남호독서당과 구분하여 동호독서당이라 한다. 성종이 수정배(水精杯)를, 중종이 선도배(仙桃杯)를 독서당 학자들에게 하사한 기록도 보인다. 독서당의 변천 과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독서당은 옛날에 용산에 폐지한 절간이 강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고쳐서 짓고 당(堂)을 만들어서 홍문관의 연소한 학자들의 글 읽는 곳을 만들었다. 연산군 때에 혁파하고 당은 궁인(宮人)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10년에 다시 독서당을 옛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는데, 여염집 사이여서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다시 좋은 자리를 두모포 남쪽 언덕 월송암(月松庵) 서쪽 산기슭을 선택하여 창건하였으며, 호당이라고 이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
「독서당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위는 “성인의 도리는 모두 서책 중에 퍼져 있다. 6경(經)의 깊은 뜻과, 여러 사기(史記)의 다르고 같음과, 백가서(百家書)의 넓고 많음을 반드시 다 거두고 넓게 찾아내어, 그 흐름을 지나서 정밀한 것을 모으고 그 모임을 보아서 요긴한 것을 찾으며, 그 넓은 것을 다하여 요약한 데로 돌아오게 한 후에야 깊이 나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독서의 중요성을 그만큼 강조한 것이다. 이제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서서히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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