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물길 따라 흐르는 역사, 그 시작엔 태종이 있었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06.16. 14:22

수정일 2021.06.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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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청계천 돌다리 전경
청계천 돌다리 전경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 태종이 청계천 공사를 시작한 까닭

조선의 도읍으로 한양이 결정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도심의 동, 서, 남, 북의 외곽에 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의 네 개 산이 둘러싸고 있고, 이들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도성은 한양의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심에 집중적으로 모이는 바람에 비가 많이 오면 도성 안 전체가 잠기는 것은 큰 고민거리였다. 이런 문제점을 간파하고 한양 도심을 관통하는 개천 조성 작업에 처음 착수한 왕이 태종이었다. 

1394년 10월 새로운 국가 조선의 도읍이 된 한양은, 정종이 1399년 3월 개성 천도를 단행하면서 잠시 수도의 기능을 잃었다. 1400년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11월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새왕조에 걸 맞는 새수도는 한양이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도시로서 한양의 약점인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도심을 관통하는 개천의 조성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1406년(태종 6) 1월 개천(開川) 공사 실시를 명한 것이었다. 

1406년 1월 16일 태종은 충청도와 강원도 정부(丁夫) 3,000명이 도성에 이르자, 덕수궁과 창덕궁에 각각 1,000명씩을 부역하게 하고, 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된 600명으로 하여금 개천을 파는 일을 맡게 하였다. 청계천 공사의 역사적인 첫 출발이었다. 3월 28일에는 조정에 있는 관리로 하여금 직급에 따라 일할 장정을 보내게 하여 개천을 파고 도로를 닦게 하였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큰비가 내리면 여전히 한양이 물바다에 잠기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1407년 5월 27일에는 큰비가 내려 경성의 천거(川渠:개천과 도랑)가 모두 넘쳤으며, 1409년 5월 8일에는 큰비가 내려 교량이 모두 파괴되고 성안에 두 명의 익사자가 발생했다. 1410년 7월 17일에는 도성에 물이 넘쳐서 종루(鍾樓) 동쪽에서부터 흥인문(興仁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통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1410년 8월 8일에는 큰비가 내려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가 무너지자, 태종은 “정릉(貞陵) 옛터의 돌로 돌다리를 만드십시오”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석교를 만들었다. 실록에는 신하들이 먼저 건의한 것으로 나오지만, 왕릉의 돌을 석교로 쓴다는 것은 태종의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여기에는 태종과 신덕왕후의 갈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릉의 석물이 남아 있는 광통교 하부의 교대(橋臺)
정릉의 석물이 남아 있는 광통교 하부의 교대(橋臺)

태종은 태조를 움직여 자신의 아들 방석을 조선의 첫 세자로 책봉한 신덕왕후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 된 후 원래는 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되어 있던 정릉(신덕왕후의 묘)을 경기도 양주(현재의 성북구 정릉동)로 옮기게 한 것도 태종의 지시였다. 여기에 더하여 태종은 흙으로 만든 광통교 다리가 소실되자, 정릉의 무덤에 있던 돌들을 활용하여 다리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현재 복원이 되어있는 청계천의 광통교 자리에는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형태의 석축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석축은 600년 전에 있었던 태종과 신덕왕후의 악연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부분적으로 개천 조성 작업을 추진하던 태종은 개천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1412년 1월에는 개천도감에 역군사의(役軍事宜:부역하는 군인들에 대해 마땅히 지켜야 할 일)를 내렸다.  

「명하기를, “군인이 일하고 쉬는 법은 파루 뒤에 공사를 시작하여 인정 뒤에 보내서 쉬게 하라. 만일 명령을 어기고 백성을 과중하게 일을 시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하게 논죄하겠다.”하고, 또 병조·순금사(巡禁司)에 명하기를, “인정 후에서 파루 전까지 백성에게 일을 시키는 자가 있으면, 감독관을 죄주겠다.”고 하고, 또 정부에 명하기를,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제생원(濟生院) 등의 관청으로 하여금 미리 약을 만들고, 또 천막을 치게 하여 만일 병이 난 자가 있으면, 곧 구제 치료하여 생명을 잃지 말게 하라.”하였다. 처음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군인이 올 때에 지인(知印)을 보내어 행차하는 길옆의 각 고을로 하여금 구호하여, 얼어 죽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위의 기록에서는 태종이 개천 공사를 지휘하면서,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 새벽 4시) 후에 공사를 시작하고, 인정(人定:통행금지, 밤 10시)이 되면 공사를 중지할 것을 특별 지시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전의감, 혜민서, 제생원 등의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건강관리와 구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의 강력한 의지 속에 1412년 2월 15일 마침내 개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고, 『태종실록』은 “개천을 준설하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는 태종의 발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태종은 새로운 개천의 조성을 초대의 역점 사업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한양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이 개천은 청계천의 원형이 되었고, 현재 서울 시민들에게 도심 속 대표적인 휴식처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신병주 교수(건국대학교 사학과)

조선시대 연구 권위자이자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가 격주 수요일(발행일 기준)마다 전문칼럼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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