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서궐'로 불렸던 조선시대 3대 궁궐

시민기자 양인억

발행일 2021.05.06. 13:03

수정일 2021.05.06. 17:42

조회 3,760

궁궐 도시 서울에는 모두 5개의 고궁이 있다. 그중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궐로 불렸다. 27명의 조선시대 왕들 중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의 임금이 이 곳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4개의 궁궐과 달리 그 위상도, 복원된 전각의 보존 및 관리상태도 아쉬운 궁궐이 바로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폐허가 된 이유로 창덕궁과 함께 양궐 체제를 형성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러 차례 화재로 퇴락하다 철종 11년에 철종이 반년 가령 머문 이후로 궁궐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들어가고 만다. 특히 고종 때 경희궁은 주요 전각만 남기고 경복궁 중건 역사에 부재로 사용된다. 이에 따라 경희궁 안 공터는 궁중의 토지로 분배되어 개간이 허용된다. 1883년에는 경희궁에 뽕나무가 식재되고 양잠소가 설치되어 근대 개화기 서양인들은 경희궁을 ‘뽕나무궁궐(Mulberry Palace)’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경희궁의 현저한 변화는 일제강점기에 발생한다. 바로 일본인 중학교, 경성중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이후 거칠 것 없는 일제는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사찰(박문사)로 옮겨 정문으로 사용하며 경춘문이라 불렀다. 경희궁 내의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등은 화재로 소실되거나 크게 원형이 변형되고 만다. 제자리가 아니지만 그나마 50여 년 만에 경희궁 권역으로 돌아온 흥화문이 대견할 따름이다.

조선시대 3대 궁궐 중 하나였던 경희궁은 옛 영화를 영원히 찾기 힘들 것 같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복원된 경희궁 금천교 위치에서도 알 수 있듯, 경희궁 터의 절반 가량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열혈 팬이기도 한 필자는 경희궁 복원을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을 잃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재 경희궁과 그 주변의 발굴, 복원 그리고 유지 관리 수준이 다른 4대 궁궐과 비슷한 정도로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과거는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한 때는 정궁의 지위까지 오른 서궐의 정문에서 일제강점기(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졌다. ⓒ양인억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과거는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한 때는 정궁의 지위까지 오른 서궐의 정문에서 일제강점기(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졌다. ⓒ양인억
경희궁의 금천교는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은 금천교 앞에 보이는 구세군회관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제자리를 잃고 말았다. 즉, 경희궁 금천교의 위치가 제 자리에 있는 것이고 흥화문이 제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양인억
경희궁의 금천교는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은 금천교 앞에 보이는 구세군회관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제자리를 잃고 말았다. 즉, 경희궁 금천교의 위치가 제 자리에 있는 것이고 흥화문이 제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양인억
경희궁 금천교는 1619(광해군 11)년에 건립된 것이 일제강점기 매몰되었다가 2001년 발굴 복원한 것이다. ⓒ양인억
경희궁 금천교는 1619(광해군 11)년에 건립된 것이 일제강점기 매몰되었다가 2001년 발굴 복원한 것이다. ⓒ양인억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경희궁을 그나마 제대로 보려면 이 자리에 서야 한다. 경희궁의 외전인 숭정전은 그 축을 인왕산에 맞추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인왕산과 하나된 경희궁을 만날 수 있다. ⓒ양인억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경희궁을 그나마 제대로 보려면 이 자리에 서야 한다. 경희궁의 외전인 숭정전은 그 축을 인왕산에 맞추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인왕산과 하나된 경희궁을 만날 수 있다. ⓒ양인억
자연 암반 위 높은 곳에 복원되어 있는 숭정문은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이다. ⓒ양인억
자연 암반 위 높은 곳에 복원되어 있는 숭정문은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이다. ⓒ양인억
숭정문 안으로 품계석의 호위를 받은 어도가 펼쳐진다. 관람을 마친 시민이 어도를 따라 숭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양인억
숭정문 안으로 품계석의 호위를 받은 어도가 펼쳐진다. 관람을 마친 시민이 어도를 따라 숭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양인억
숭정문에서 바라본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일제강점기 경희궁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일본 절인 조계사(서울시 종로구의 현 조계사와 다른 절임)로 팔려 나갔다. 해방 후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선 지금은 정각원 이라는 이름의 법당이 되었다. 현재 경희궁에 있는 숭정전은 1994년 복원된 전각이다. ⓒ양인억
숭정문에서 바라본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일제강점기 경희궁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일본 절인 조계사(서울시 종로구의 현 조계사와 다른 절임)로 팔려 나갔다. 해방 후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선 지금은 정각원 이라는 이름의 법당이 되었다. 현재 경희궁에 있는 숭정전은 1994년 복원된 전각이다. ⓒ양인억
상‧하월대 위에 올라 선 숭정전에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없지만, 월대의 기단부, 계단을 구성하는 부재 그리고 해치는 발굴된 유물을 사용해 오랜 세월의 기품이 느껴진다. ⓒ양인억
상‧하월대 위에 올라 선 숭정전에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없지만, 월대의 기단부, 계단을 구성하는 부재 그리고 해치는 발굴된 유물을 사용해 오랜 세월의 기품이 느껴진다. ⓒ양인억
암반 지형의 영향으로 높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희궁에서는 숭정전을 둘러싼 행각의 지붕과 계단의 높이 차이가 쉽게 눈에 띈다. 서궐도에 의하면 이 부분에 제향에 쓰이는 향과 축문에 관한 일을 보는 향실이 있었다. ⓒ양인억
암반 지형의 영향으로 높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희궁에서는 숭정전을 둘러싼 행각의 지붕과 계단의 높이 차이가 쉽게 눈에 띈다. 서궐도에 의하면 이 부분에 제향에 쓰이는 향과 축문에 관한 일을 보는 향실이 있었다. ⓒ양인억
숭정전 외부, 태령전 마당에서 본 향실 지붕이 도심 속 빌딩과 이색적인 조화를 이룬다. ⓒ양인억
숭정전 외부, 태령전 마당에서 본 향실 지붕이 도심 속 빌딩과 이색적인 조화를 이룬다. ⓒ양인억
숭정문이 있는 남쪽으로 낮아지는 지형에 건립된 숭정전 서측 행각의 열주들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양인억
숭정문이 있는 남쪽으로 낮아지는 지형에 건립된 숭정전 서측 행각의 열주들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양인억
숭정전 월대 위에서 왕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정 마당의 모습. 숭정문 밖, 초록의 생태 띠를 넘어서면 곧바로 현대 건축물과 차량 소음이 가득한 도심이 펼쳐진다. ⓒ양인억
숭정전 월대 위에서 왕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정 마당의 모습. 숭정문 밖, 초록의 생태 띠를 넘어서면 곧바로 현대 건축물과 차량 소음이 가득한 도심이 펼쳐진다. ⓒ양인억
자정전은 임금이 신하와 국정을 돌보거나 경연을 여는 편전이다. 자정전은 숙종이 승하했을 때 관을 모시던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 위패 등을 임시로 봉안하기도 했다. ⓒ양인억
자정전은 임금이 신하와 국정을 돌보거나 경연을 여는 편전이다. 자정전은 숙종이 승하했을 때 관을 모시던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 위패 등을 임시로 봉안하기도 했다. ⓒ양인억
자정전 월대 위에서 바라본 행각. 지형 때문에 계단식으로 높이 차가 나는 행각의 지붕은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양인억
자정전 월대 위에서 바라본 행각. 지형 때문에 계단식으로 높이 차가 나는 행각의 지붕은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양인억
서암이라는 독특하고 거대한 이 바위는 본래 왕암(王巖)으로 불렸다. 이 왕기가 서린 바위 때문에 술사의 말에 따라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한다. 서암은 숙종 때 바뀐 이름이다. ⓒ양인억
서암이라는 독특하고 거대한 이 바위는 본래 왕암(王巖)으로 불렸다. 이 왕기가 서린 바위 때문에 술사의 말에 따라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한다. 서암은 숙종 때 바뀐 이름이다. ⓒ양인억
서암에서 바라본 경희궁 전경. 좌측의 전각이 자정전이고 그 앞에 자정문 지붕이 보인다. ⓒ양인억
서암에서 바라본 경희궁 전경. 좌측의 전각이 자정전이고 그 앞에 자정문 지붕이 보인다. ⓒ양인억
영조 20(1744)년 자신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태령전을 중수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 건물은 '서궐도안'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양인억
영조 20(1744)년 자신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태령전을 중수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 건물은 '서궐도안'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양인억
태령전의 정문인 태령문. 우측의 행랑보다 지붕이 높은 솟을대문이 태령전의 권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양인억
태령전의 정문인 태령문. 우측의 행랑보다 지붕이 높은 솟을대문이 태령전의 권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양인억

■ 경희궁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 휴관일: 1월 1일,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
○ 관람시간: 09:00 ~ 18:00
○ 입장료: 무료
홈페이지 바로가기

시민기자 양인억

경복궁지킴이로서 궁궐을 비롯한 서울시 문화와 역사 현장을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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