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뉴질랜드 청년이 한국에 온 이유?
시민리포터 서형숙
발행일 2012.09.06. 00:00
단벌신사로 평생 전세방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서울톡톡]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 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남의 가난한 살림을 도와주기란 끝이 없는 일이어서, 개인은 물론 나라의 힘으로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말이다. 오죽 힘든 일이면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고 비유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훈훈한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해 사회의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는 따뜻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자원봉사자가 되어 묵묵히 대가 없이 봉사하기도 하고, 동화속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소년소녀 가장을 도와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또 복지시설에 근무하면서 독거노인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어려운 점은 없는지 살펴보는 일을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뜻이 맞는 봉사자들끼리 단체를 만들어 이웃사회를 위해 다방면으로 후원활동과 기부문화를 펼치는 이들도 있다.
그들 중에서 특별히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지난 46년간 한국인의 빈민구제에 힘써온 파란 눈의 '젊은이'가 있다. 바로 뉴질랜드에서 온 브레넌 로버트 존(Brennan Robert John, 71세)신부로 안광훈이란 한국 이름도 갖고 있다. 71세라는 나이에 '젊은이'란 말이 다소 의아하게 들리겠으나, 그에겐 완벽히 어울리는 말이다.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 있는지 겨우 점으로 보이는 이 나라가 가난했던 60년대, 20대의 젊은 청년으로 와서 그때 그 마음과 열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벗되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일(화) 서울복지대상 시상식이 열리는 대한상공회의소 그랜드홀에서 대상 수상자인 안 신부를 만났다. 복지대상 수상을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전하며, 기분이 어떠신지 여쭈었다. "기분 매우 좋죠. 이렇게 상 주셔서 감사하고 모든 분들께 고맙고..." 그렇게 살짝 웃으면서도 다소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국에 온 지 47년. 1966년 한국으로 파견 온 안 신부는 서울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 후, 그는 강원도 정선의 본당 주임 신부로 부임하게 됐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그 강원도 산골에서 11년을 지냈어요." 그때는 청년이었겠다는 리포터의 질문에 "그렇죠. 그때는 청년이었죠. 하하하."라고 웃음을 보인다. 새파란 이십대에 강원도 시골 촌구석에 들어가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바치고 어느새 40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 흰머리가 성성해진 모습으로 변한 안 신부는 그 짧은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눈빛 속에는 그 시절의 일들이 떠오르는 듯 눈가가 촉촉해졌다.
25살 젊은 그가 정선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바로 정선신용협동조합이다. 농협이 있으면서도 가난한 농민들이 대출을 받지 못해 치료비, 전기료, 아이들 교육비가 없어 고통받는 것을 보고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1972년에 저소득층 대출을 위해 주민들과 함께 한 계좌당 100원씩 모은 것이 시작이 되어 이제는 4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대규모 조합이 됐다. 또한 그는 병원이 없어 맹장과 같은 병으로도 사망하는 정선 주민들을 위해 1975년 성프란치스코 의원을 건립했다.
1981년 서울 목동성당 주임신부가 된 이후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섬김은 계속됐다. 목동 재건축 현장에서 어떤 보상도 없이 쫓겨나는 철거민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철거반대운동을 지지하며 본당 건물 사용 등과 함께 물적·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100세대 정도의 목동 철거민들이 시흥시 목화마을을 구성 할 수 있도록 당시 1,000만원의 종자돈을 기부하여 토지구입과 주택건축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빈민사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92년에 미아 6동에 전셋집을 얻었어요. 달동네 주민들과 함께 살기 위해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부탁했죠. 그때 목동 재건축 현장처럼 미아 6동에서도 똑같은 재개발이 진행될 것을 예감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는 철거를 앞둔 세입자들을 위해 기꺼이 그의 전세방을 제공하여 대책회의를 진행했다. 이후,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그 자신도 그가 살던 전세방에서도 쫓겨났고, 주민들과 함께 세입자로서 권리 보장과 임시 거주지 마련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 결과 1997년 미아7동에 임시 이주단지 건립 성과를 이끌어냈다.
8년 전부터는 '삼양동 주민연대'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주거복지센터를 열어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고, 2년 전엔 소액대출 은행인 '한바가지 은행'도 운영하고 있는 지금도 강북구 송천동 전셋집에서 살며 도시빈민을 위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꾸준히 또 열심히 빈민사역에 힘써온 그는 수상 소감에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라며, 25살에 한국에 와서 고희가 될 때까지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이 상을 돌린다"며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로 그는 정부를 향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낮은 곳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고 부탁을 했다. 자신이 살던 미아동도 많이 발전된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없어진 것 아니며, 아직도 너무나 가난으로 고통받는 자가 많기 때문. 남은 생도 이곳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보내며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안 신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함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그의 기쁨이기 때문에 활짝 웃는 얼굴로 힘차게 발을 내딛는 그를 보면서 진정한 기쁨은 '혼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이 함께 사는 세상의 가치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찬 경종이 되어주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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