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금은 9백원, 감동은 9만원 특급 버스 타세요”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박관식

발행일 2011.01.10. 00:00

수정일 2011.01.10. 00:00

조회 5,248

동가홍상(同價紅裳)이란 말이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뜻으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다 그렇던가. 같은 값으로 제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서울시민들이 매일 접하는 시내버스를 타는 데도 '동가홍상' 법칙이 따를까? 정답은 ‘맞다’이다. 겨우 900원밖에 안 되는 저렴한 서민들의 발이지만 매일 벌어지는 교통전쟁에선 그 법칙이 은연중 진행된다. 같은 값이라도 친절한 기사를 만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그 반대의 경우는 뻔하다.

“어느 날 우연히 이 버스를 타고 감동받은 이후, 그 다음부터는 중독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시내에 볼 일이 있으면 디제이 아저씨 차를 일부러 타고 나갑니다.” 강서구 신월7동 338번지 중부운수 차고지에서 출발하는 603번의 첫 승객인 김영미 씨의 칭찬이다. ‘서울 70사 7924’이란 번호판을 단 603번 시내버스 DJ 운전기사 고창석(56)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세계 최초의 DJ 버스 기사'로 알려진 그는 이미 직장뿐만 아니라 서울시의 유명인사이다. 특히 603번 코스인 신월동 시영아파트, 목동역, 당산역, 합정역, 신촌역, 아현역, 서소문사거리, 시청역, 숭례문, 서울역, 충정로역 등지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는 가히 시민 영웅이었다.

티아라, 소녀시대, 아이유 등 아이돌 스타도 줄줄~
그 소문을 듣고 지난 6일 오후 2시 그의 버스를 탔다. 이미 오후반 첫차 시간표를 확인한 첫 승객은 물론 중간에 타는 손님들이 나누는 구면(舊面)의 인사가 심상찮았다. 느낌으로 보아 이 버스를 기다린 탑승객이 서너 명은 되어 보였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세계 최초의 DJ 버스카페 중독자’들인 셈이다.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벌써 새해가 6일 지났군요. 새해 복 많이 받고요. 노자도 일찍이 말씀했지만 남에게 봉사했는지, 가족에게 신뢰받았는지, 자신을 위해 얼마나 했는지 올해는 한 가지라도 실천해야겠지요. 돈, 명예, 사랑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입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는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승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한다. 곧이어 요즘 뜨는 신세대 가수 아이유의 ‘좋은 날’을 틀어주며 멋진 멘트를 날린다.

“덕성여고에 다니는 아이유의 ‘좋은 날’입니다. 2008년 데뷔했지요. 세상 살면서 가장 귀한 시간이 언제일까요? 지나간 시간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지요. 슬픔, 괴로움 잊고 음악을 들으세요. 평생 상처받지 않는 게 음악이랍니다.”
‘아이유는 동덕여고 2학년인데…. 아차, 이런 거구나’ 싶었다. 차라리 오래된 팝송이나 가요라면 오히려 실수하지 않는데, 나이 탓인지(그의 말에 따르면) 아주 가끔 오자(?)가 나온다고 했다. 역시 신세대 가수인 티아라, 소녀시대의 이름을 줄줄 부르다가 간혹 실수해도 애교로 봐주는 이유가 그렇다.

어쨌든 운전을 조심스럽게 하면서도 기가 막힌 멘트로 승객들의 가슴을 적시는 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인사한다. 분명 603번 버스는 900원짜리가 아닌 9만원 특급버스이다. 그만큼 행복이 100배 충전된다. 멋모르고 타 잠시 얘기를 주고받던 중년여인들이 슬며시 말꼬리를 감춘다. 어느덧 버스 안에 행복 바이러스가 퍼진 징후이다.

“자, 지금부터는 좀 신나는 음악으로 바꾸겠습니다. 올해 내가 나아갈 길이 뭘까요? 그 길을 생각하며 윤태규의 ‘마이 웨이’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미리 말은 안 했지만 진행하는 솜씨로 보아 철저하게 준비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것 없어.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라는 노랫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오후, 밖의 날씨는 열흘 넘게 계속되는 한파였지만 버스 안 온도는 푸근하고 따스했다. 그야말로 마음의 온도를 따끈하게 데우면 피부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님을 배우는 현장이었다. 정거장마다 매번 안내 방송을 하는 틈틈이 살이 되는 덕담을 날린다. 늘 들어 왔던 기계적인 목소리 안내보다 훨씬 부드럽다. 문득 서울 시내버스 안내 방송 멘트를 이번 기회에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혼하려던 부부 돌려세우고 외국인과 ‘예스터데이’ 합창
고창석 씨가 버스 운전을 처음 한 것은 1995년이다. 2001년 오디오 시설이 갖춰진 버스를 배정받고 음악을 틀어주다가 2년 후 누군가 “DJ는 왜 안 하냐”고 제안하는 바람에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 역시 예전에는 못난 손님들을 만나면 하도 억울해 버스에서 내려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버스 DJ를 보면서 내가 먼저 친절해지다 보니 손님들도 바뀌더라”며 “가는 정이 고와야 오는 정이 곱다”는 철학을 새삼 일깨웠다.

8년째 DJ 버스카페를 해오면서 반발한 사람은 모두 5명이었지만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승객은 부지기수이다. “60대 초반의 부부가 씩씩거리며 버스에 오르더니 각자 앉더군요. 그래서 초점을 사랑에 맞춰 ‘러브 스토리’, ‘내 사랑 내 곁에’ 등을 틀어주며 부부가 무엇인가 들려주었지요. 그랬더니 나중에 같이 앉더군요.”
그 노부부는 원래 법원에 가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뜻하지 않게 그의 DJ 버스에 타고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이다. 나중에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겠다는 것을 “마음만으로 간직하겠다”며 겨우 사양했다.

“한번은 소낙비가 많이 와 배차 간격이 30분이나 벌어졌는데 어떤 아줌마가 타더니 먹을 것을 주는 거예요. 그 오랜 시간 다른 버스도 있는데 내 버스만 기다린 거지요.” 그 아주머니는 자신의 동생도 버스운전을 했는데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며 고창석 씨가 남같지 않다고 했단다. “2005년엔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남학생이 제 버스를 즐겨 탔지요. 집이 상암동인데 일부러 탄 이유가 참 슬펐어요. 내가 아버지 같아 탔다는 겁니다. 아빠와 엄마는 이혼 후 집을 나갔고, 아이는 임대아파트에서 할아버지와 살았지요. 그 아이 볼 때마다 안쓰러워 혼났어요."

그의 603번 카페버스는 외국인들도 감탄한다. 한번은 영국인이 버스에 탔는데 '예스터데이'를 틀어주니 한강 다리를 건너며 버스 안의 승객 모두가 이 노래를 합창했다고 한다. 한때 어려운 환경을 극복, 시내버스를 운전하면서도 서울시민에게 희망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이 아닐까? 지금은 어느새 유명인사가 되어 있지만 절대로 오만하지 않은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어 더욱 그렇다.

중부운수(성수경 대표)의 신참 기사는 으레 그의 버스를 타야 한다. 친절이 어떤 것인지 몸소 배우는 것이다. 그는 서울시 교통연수원에 강사로도 출강한다. 퇴근하면 신곡을 듣고 그에 맞는 멘트를 준비한다. 누가 돈을 더 얹어 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오늘도 서울시민들에게 친절로 행복을 세일하고 있다. “2014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할 겁니다. 그 후 입이 열릴 때까지 경로당을 찾거나 남을 위해 봉사하던지….”
그는 오늘에 전념할 뿐 내일은 나중 일이라며 한움큼의 미소를 뿌린다. 참 고맙고 소중한 웃음이다. 서울 하늘 아래 천사가 따로 없다.

#DJ버스 #행복바이러스 #60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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