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 못한 꽃 한송이, 87세 소녀의 고백

admin

발행일 2010.08.18. 00:00

수정일 2010.08.18. 00:00

조회 2,886

한여름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가 열린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작은 관심에도 감사해하는 할머니들 중 주름진 얼굴에 유난히 수줍은 미소를 보내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올해 87살 박옥선 할머니. 할머니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7명이 거처하시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힘겹게, 아프게,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굴절된 역사의 편린을 들려주기 위해 애쓰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이번 주 [인터뷰 서울人]은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촉구하고 한국 사회의 망각증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박옥선 할머니가 처음 세상에 고백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가난했지만 내외 정조 관념이 있던 조선의 딸, 공장에 취직하러 친구 따라 갔다가…

"내 고향이 경남 밀양임다. 끌려간 거는 1941년. 해방될 때까지 중국 목릉 인근에서 4년 (위안부) 생활했슴다. 우리 가정이 하도 곤란했드랬어요. 아부지는 내 열 네 살에 돌아가시고, 큰오빠, 둘째 오빠 돈벌러 떠나고, 그래 셋째 오빠하고 어머니하고 동생들, 여섯 식구 살았슴다. 오빠가 하루 오십 전 벌어 가지구, 양식을 홉대로 하루 사먹으면 없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슴다. 그때 살기 힘든 조선 사람들 중국 참 많이 갔단 말임다. 그래 한 동네 사는 동무가 와서 '옥선아, 중국 바느질 공장에 사람 쓴대서 모두 간다니까, 우리 아니 가겠는가?' 그럽디다."

"그래 동무하고 밤으로 나왔슴다. 그냥 우물물 기른다고 고향집에서 나올 때 입던 조선치마저고리 그대로 나왔슴다. 막상 역전 가보니 무섭습디다. 그래 “아니 가겠슴다” 하니 우리를 차로 훌떡 던집디다. 뭔가 물컹한 것이 닿아 보니, 차 안에 여러 곳에서 모다 온 조선 여자들이 가득하더란 말임다. 차에 오르니까 얼굴에 막을 턱 씌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기차 타고 갈 때도 계속 방직공장에 가는 줄 알았슴다."

"내사 학교는 아니 댕겼슴다. 쪼끄마할 때 야학에 댕겼는데 그때 돈으로 오십 전도 없어서 내 공부 계속 못했슴다. 야학에서 '가갸거겨 1, 2, 3, 4' 이런거 배왔슴다. 우리 아버지가 농민은 농민인데 밭이 없어 사람들이 보리 빌 때 아버지 따라가면 밥 좀 얻어먹은 생각나고 그렇슴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 내외할 줄 알았슴다. 낮엔 남자들 있으니 여자는 우물물 밤에 긷게 하고, 여자라고 오빠들 친구들이 오면 같이 놀지 못하게 방안으로 들어가라고 내 그렇게 배웠드랬슴다."

지옥에서의 삶, 지금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

"기차에서 내려 공장 간다 하더니 어떤 집으로 데려갑디다. 쪼끄만 다다미방에 요하고 소독할 대야 놓여 있었슴다. '집으로 가겠슴다' 하니까 이게 공장이다 하면서 시키는 대로 들으라고 그럽디다. 말 아니 들으면 허리띠 같은 걸로 막 내리칩니다. 내 그 때 군화발로 채여서 정강이가 이리 흉하게 우그러들었슴다. 그래 시방도 무릎 관절이 안좋슴다."

"부끄러워 말도 못함다. 제일 힘들었던 거는 군인들 많이 받는 거임다. 정말 주일날이면 군대들이 막 줄을 설 정도로 많이 와서 자꾸 앞사람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린단 말임다. 그럴 때는 정말 누워서 열도, 열 다섯 그 이상도 받는데 그 숫자를 헤아리지 못함다. 저녁 되면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군관들이랑 대장들이랑 그런 높은 사람들은 또 아무 때나 댕기니 열 두 시전까지는 시름 놓고 못 잡니다. 내 시방 허리 아픈 것도 다 그게 그때 생긴 거란 말임다. 이날 이때까지 한평생 이러구 고생하지 않슴까?"

"인제 가만 생각해보면 도망쳤으면 좋았겠지 싶다가도 그땐 그거 꿈도 못꿨다 말임다. 일본 군대들, 여자들 달아날까봐 강에 빨래 조금 하러 가도 여럿이 가지, 문 앞이라도 혼자 절대 아니 내보냄다. 변소 가고 그럴 때도 문에서 보초 지킵니다. 울타리도 있습디다. 일본 사람들, 골(머리)이 좋아요! 도망가면 하루 두 끼 먹는 밥도 못 얻어먹고 뚜드리맞슴다. 거기서 머저리병(임질) 걸려 죽은 여자도 있슴다. 그런 병 걸리면 저 먼데 병실에다 따로 약이랑 줘 먹고 일어나면 다시 오고, 거기서 죽으면 없애버립니다. 나도 병을 앓아 두 번 치료한 적 있슴다. 그래 위안소 안에서 여자들끼리 모여 울고 신세타령 했슴다. 내 맘 헤퍼 영 자주 울었지요. ‘이렇게 살아서 사람이 무슨 값이 있는가. 그래 내가 죽자’ 하고 독한 맘을 먹었드랬습니다. 그래도 귀신 씌어야 죽지 못죽겠습디다. 이런 말 어떻게 다 하겠슴까? 어디에 대고 하겠슴까? 어디다 내놀라 해도 내 가슴이 아파서 말 못하고, 남편이라도 자식이라도 부끄러와서 내 말 아니하고, 내 이래가지고 무슨 면목으로 부모를 찾아가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 본가도 찾지 못하고……."

해방은 되었지만 버려진 신세

"해방될 때 아주 사변났지요. 소련 군대들이 막 밀고 내려오고, 일본군들은 겁이 나니까 달아나다 여기저기서 포 맞으면 자동차 팍 터지고 불나서 다 죽고 그랬어요. 그럴 때 관리자도 여자들 다 버리고 어디로 갔는지 모름다. 그래 여자들끼리 그냥 우왕좌왕하다가 피난한다고 타라하니까 군대들 가는 자동차 올라탔슴다. 그러다 앞 자동차가 폭발되고 거기 탄 사람 다 죽고 불타고 하니까, 난 뒤에 타고가다가 뛰어내렸슴다. 마지막에 해방 될 때 남아있던 여자는 한 여남은 넘었는데 오다가 그때 폭격에 다 헤어져 없어졌슴다."

"그래 보름동안 먹지도 못 하고, 얼굴 뜯기고, 옷도 다 찢어져 산속을 헤매다가 건너 부락에 밥 얻어먹자고 갔는데 그 집에서 영감 내외가 붙잡더란 말임다. '지금 조선 들어가믄 너 못산다. 그러니 여서 살자'고 못가게 해요. 내 그때 떨어져 한평생 중국 흑룡강에서 살았슴다. 나다니지 않아서 한어(중국말) 못하고, 내사 그저 거기 떨어진 것 그것만 알지 아무것도 모름다."

"이듬해 이월 달에 잔치했슴다. 남편도 나이 뭐 십여 살이나 이상이지. 어떻게 젊은 사람이 내한테 오겠어요? 그래 살다가 아들 낳고 아들들 공부시켜 출세해서 내 몇 년간은 편안했지요. 그런데 복이 없을래 노니까 우리 영감 상사나고(돌아가시고) 삼 년만에 우리 큰아들이 병이 나서 십 년 앓았슴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고통, 세상을 향해 외치다

"텔레비전에 일본 사람 나오는 거 난 아니 보고 싶슴다. 우리도 저렇게 지냈구나 싶은 게 영 안타까울 때 많슴다. 중국 살 때도 남 보는 데는 모르는 것처럼 하고 같이 앉아있어도 속으로는 가슴에 열이 나고 그랬단 말임다. 시방도 밤에 속타서 때굴때굴 구르며 그냥 우는데 평생 애태운 거 말도 못하지요."

"우리 둘째 아들이 '다른 사람들은 형제간 다 찾고 그러는데 어째 엄마는 형제간을 찾을 줄 모르는가. 형제간 찾고 그러면 우리도 거기 가보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합디다. 그래 말 아니할까 하다가 내 사실을 말했슴다. 그래 세상에 태어나서 내 이렇게 정말 고통받고 살은 것 하늘이 알까 땅이 알까 모른다고 방송국에다가 썼슴다. 그랬더니 부모도 찾아줄 수 있고, 해결할 만한 일은 해결해주겠다고 방송국에서 편지가 왔어요. 그 뒤로 한국에서 소장이란 이가 와서 나를 한국에 데리고 나왔슴다. 이제 내 한국 들어와보니 나 사망신고 돼있고, 우리 형제 칠남매 다 죽고 밀양에 동생 하나 살아있습디다. 조카들한테 미안하고 낯 없어 그래서 여기 나눔의 집에 있게 됐슴다."

"동생 얼마 전 여기 왔다갔슴다. 내 여기 들오니 자식들도 인제 여 근방에 들어와 삽니다. 내 언제 이런 복 있었나 함다. 그래 내 인제 일본한테 사과 받으면 죽어도 원 없슴다. 일본이 사과 아니하면 내 죽어도 눈 못감을 것 같슴다."

시민기자/안혜련
gardencir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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