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형벌이 아니게 해주세요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5.02. 00:00

수정일 2014.10.05. 20:04

조회 5,253

장미

집이 불타지 않게 해주세요
폭격기가 뭔지 모르게 해주세요
밤에는 잘 수 있게 해주세요
삶이 형벌이 아니게 해주세요
엄마들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
아무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게 해주세요
누구나 뭔가를 완성시키게 해주세요
그럼 누군가를 믿을 수 있겠죠
젊은 사람들이 뭔가를 이루게 해주세요
늙은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이들의 기도> 전문

[서울톡톡]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했다. 브레히트의 시 제목처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음을 자조적으로 탄식한 것이다. 여기서 '아우슈비츠'는 반드시 대학살이 벌어졌던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생명의 가치가 턱없이 떨어지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모든 잔인하고 혹독한 상황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아우슈비츠'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브레히트는 시를 쓸 수 없는 까닭에 대해 "아우슈비츠의 일들은 의심할 바 없이 문학적인 묘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문학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런 기법들은 개발할 수도 없다"고 토로한다. 시가 자기도취의 섬어(譫語)가 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시를 세상에게 말 걸기, 나의 목소리를 빌어 모두의 노래를 부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때로는 침묵이 차라리 시가 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말이 부끄러운 상황, 말조차 필요 없는 고통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가 사라진 세상에는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기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절대적 존재에게 손 모아 비는 것뿐이다.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든 무신론자든, 그 순간 간절함을 바치는 일에는 차별이 없다. 어쩌면 기도는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다. 손 써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규이며, 체념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혁명적 서사극의 창시자 브레히트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아이들의 기도는 단순한 고백이나 절규, 안간힘에 그치지 않는다. 시의 6행까지를 통해 그려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폭력에 고통 받는 약하고 가엾은 존재다. 기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주 평범하고 사소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들은 짧은 생애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겨우 세상에 어섯눈을 떠가는 어린 것들, 연둣빛 생명이 삶을 '형벌'로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서 전쟁의 잔혹함과 약자들의 공포가 얼마마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어이없이 잃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희망은, 다시금 내일을 소망한다.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빼앗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불신과 경계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이루는 무언가는 새로울 것이다. 늙은 사람들도 이룰 수 있다면 낡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아이들이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지옥에서 천국을 꿈꾸는,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갈구하는, 아이들의 기도가 서럽고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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