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絃)의 인생
admin
발행일 2009.08.25. 00:00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처럼 손때 묻어 반들반들해진 작업대 앞에서 앞치마를 둘러맨 채 작업 중이던 선생이 맑은 눈빛과 다정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신다. 그에게서는 으레 한 분야의 최고 거장들이 지녔음직한 괴팍함이나 완고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소박하고 자그마한 작업실에는 시간이 멈춘 듯이 정겨움이 가득한 도구와 부품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주인장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곳이 '명장의 공방'이구나. 그로부터 째깍째깍 메트로놈 같은 시계 소리를 배경으로 말수 없는 이 거장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좋은 소리를 내는 명품 악기의 내력을 좇아가듯 삶의 향기 가득한 선생의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때는 바야흐로 1969년. 연세대 교회음악학과를 졸업하고 교회 음악 쪽에서 잘나가던 국내 입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청년 김성상은 우연히 동갑내기 이주호 씨를 만나 악기 제작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이주호 씨는 세계적인 악기제작 명문으로 손꼽히는 독일 미텐발트 국립 바이올린 제작 전문학교에서 마에스터(Meister) 자격을 얻은 실력파 악기제작자. 이 만남은 선생의 나머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내가 유럽으로 악기제작을 공부하러 가겠다니까 이주호 씨가 붙잡는 거야. 말도 안 통하는 유럽에 가서 왜 또 고생하느냐고. 자기에게 배우라고 말이지. 그리고서 서로 의기투합해가지고 시카고 바이올린 제작학교를 설립해서 이주호 씨는 교장이 되고 내가 그 학교의 1호 졸업생이 된 거야.” 악기제작 국제대회 최초 1등 한국인 수상자 이처럼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한국 바이올린 제작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며 등장한 그는, 이후 각국의 명장과 온갖 명기가 모여 있는 뉴욕의 악기 시장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르네 모랄(Rene A, Morel)과 바하칸 니고시안(Vahakn Nigogcsian)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 및 수리 분야의 명장들에게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뉴욕의 작 프란세 악기사와 스트라디바리샵 등 유명 바이올린 공방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던 선생은 미국 생활이 주는 풍요와 안정을 접고 어느날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압구정동에 세운 것이 전설적인 바이올린 제작학교다. 거기서 무료로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서양악기 제작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당시 국내 실정을 고려해볼 때 악기제작학교 설립과 무료 교육을 위해 선생이 감당해야 했을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학교가 3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은 선생의 가슴에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그때의 제자들인 이정오, 지준환, 전훈주 씨 등이 왕성하게 활동 중인 것이 자못 자랑스럽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자신만이 지닌 제작기법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고 싶지만, 점점 어려워지는 국내 바이올린 제작자의 길을 떠올리면 선생은 저절로 고개를 흔들고 만다. “몇 년 동안 바이올린 제작학교에서 배우고 졸업했다고 완성이 아니야. 그건 초등학교 졸업처럼 가장 기본에 불과하거든. 그 이후로 끝없는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데…….” 실제 현장에서 악기 제작은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하며 스스로 하나씩 원리를 깨쳐나가는 시간을 거쳐야만 한다. 바이올린 음색의 비밀은 나무와 칠에 달려 있어
바이올린은 또한 늘 연주자들이 손에 들고 사용하는 악기의 특성상 수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수리는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현악기는 수리할 때 전체를 분해하거나 일부분을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제작자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바로 뛰어난 수리 기술자야. 악기 제작은 정해진 대로 해나가면 어떻게든 결과물을 내기 마련이지만 수리는 다르지. 수리를 하려면 악기를 뜯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판단이 중요하니까…….” 이같이 지난한 수고가 수반되어야 하는 제작과 수리의 과정. 하지만 선생은 현악기 제작 및 수리가 직업이 되기 힘든 현실을 떠올린다. “그 사람들한테는 인생이 달린 문제인데….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는 내 욕심만으로 이 어려운 길을 걸으라고 할 순 없어.” 현재 우리 바이올린 시장은 연주자용 고급악기 분야는 유럽 '올드' 악기들이 점령하고 있고, 연습용 악기 쪽은 저가의 중국 악기들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잠식해버린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최고의 소리를 추구하느라 명기를 소유하고자 하는 현악기 연주자들의 꿈을 선생과 같은 제작자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대부분 국내연주자들이 콩쿠르에 집착하느라 '올드'악기만 최고로 치는 것이 아쉽다. “중국 오케스트라 악기를 보면 자국 악기의 비율이 70~80%에 이르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1~2%나 될까?” 이렇듯 국내산 악기의 판로가 꽉 막힌 상황에서 바이올린 제작자들은 제작·수리보다는 수입악기의 판매 쪽으로 활로를 모색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진로를 바꾸는 후배들을 볼 때면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선생은 질책보다 어버이 같은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앞으로도 십년은 거뜬히 악기 만들 수 있는데 선생의 손에서 만들어진 바이올린은 악기전공자들이 탐낼 만큼 매력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어 국내외에서 인기가 높다. 그렇지만 국제적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국내 바이올린 제작 활성화를 위해 서울에 보금자리를 튼 지 20여 년 동안, 그는 한결같이 서초동 '김성상 현악실'을 지키며 현악기들을 만들고, 수리하고, 어려운 이들을 보면 베풀면서 보내왔다. “제일 아쉬운 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거지. 앞으로도 십년은 거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어떨지…….” 앞으로의 바람을 묻는 질문에 선생은 후진을 양성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내비친다. 특히 지금도 여건만 허락된다면 다시 학교를 열어 악기 제작에 뜻이 있는 후학들을 길러내고 싶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부지런히 악기를 다듬는 선생의 손은 쉬는 법이 없다. 그 모습이 세상풍파 한 가득 담고서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 마을 입구 큰 나무 같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익장의 맑은 영혼이 새로 탄생할 바이올린에 담기고 있는 그 현장에서, 그것이 젊은이들의 손에서 다시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살아나 오래도록 우리 곁에 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시민기자/안혜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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