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가 `개념녀`이길 바라며...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3.08.20. 00:00

수정일 2013.08.20. 00:00

조회 1,831

[서울톡톡] 올 상반기 가요계를 대표하는 흐름은 '나쁜 여자'였다. 레이디스코드의 <나쁜 여자>가 포문을 열었고, 이효리의 <배드걸>이 그 흐름을 굳혔다. 뒤를 이어 투애니원의 씨엘이 <나쁜 기집애>로 나쁜 여자 트렌드의 정점을 찍었다. 뒤이어 걸스데이의 <여자대통령>이라든가 달샤벳의 <내 다리를 봐> 같은 노래들이 기존의 여성상과는 다른 여성상을 노래했다.

이효리 <배드걸>의 원래 제목은 <싸가지 없는 여자>였다고 한다. '싸가지 없는 여자'란 어떤 여자를 말하는 것일까? 정말로 아무에게나 예의 없이 굴며 불쾌감을 조장하는 그런 여자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는 정말 나쁜 사람은 대중문화에서 절대로 사랑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올해 인기를 끈 나쁜 여자, '싸가지 없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바로 당당한 여자, 주체성을 회복한 여자, 진짜 '개념'을 탑재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여자가 나쁜 여자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기존 가부장적 억압사회가 여자에게 요구했던 윤리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억압 구조에서 봤을 때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는 여자는 '싸가지 없는' 사람이다.

자고로 여자 목소리는 담을 넘으면 안 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한 성리학적 억압 구조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은 이슬람 문화권 다음 수준으로 여자를 억압한 나라였다. 여자는 시집가면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하는 식으로 그저 순종만 하며 살아야 했다. 삼종지도라고 해서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혼인한 후에는 남편을, 늙은 후에는 아들을 따르며 살라고 했다.

이런 억압구조를 상징하는 말이 바로 '시월드'다. 요즘 들어 한국의 시월드는 국제적으로 악명을 드높이고 있다. 한류 드라마를 통해 한국식 혼인문화를 알게 된 외국 사람들이 새삼 그 억압구조에 놀라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부모들이 딸과 한국 남자와의 결혼을 꺼릴 정도라고 한다.

한국의 억압구조가 여자에게 안긴 것은 바로 '한'이었다. 그 한을 풀 방법도, 자기 주체성을 주장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한이 안에서 쌓이고 쌓여 결국 '울화'가 되었다. 바로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화병이다. 이미자는 그런 한을 표현하는 목소리로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었다.

여자가 한과 울화를 풀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적인 신파 멜로극에서 여자는 끊임없이 운다. 울고 또 운다. 울긴 우는데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조용히 흐느껴 울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한국 드라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여성상인 '청순가련'이다.

'나쁜 여자'는 더 이상 청순가련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억압구조가 요구하는 착한 여자, 즉 순종적인 여자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젠 발칙하고 싸가지 없게, 나의 주체성을 찾겠다고 한다. 이효리는 'TV 속에 청순가련 여주인공 그 옆에 더 끌리는 나쁜 여자'라고 노래하며, 청순가련을 콕 찍어 거부했다. 이것은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고 그래서 나쁜 여자 이효리는 동시대 여자들의 롤모델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한편, 나쁜 여자는 조신한 여자가 아닌 자기 욕망을 당당히 드러내는 여자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노출을 하게 되고, 노래 가사도 선정적으로 변해갔다. 어느 사이에 나쁜 여자는 곧 야한 여자가 돼버렸다. 그런데 야한 여자는 남자들이 가장 원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내 다리를 보라'며 치마를 풀어헤치는 여자는 일종의 성적 소비상품으로 소비된다.

전통적인 가부장구조의 억압을 거부하는 여자들이, 상업구조가 만들어낸 새로운 억압구조에 포획되어가고 있다. 올 상반기에 나쁜 여자 신드롬과 함께 노출 바람이 불었다. 나쁜 여자들은 당당한 욕망의 주체가 되겠다고 하지만, 그 욕망이 정말 자기자신의 것인지 자본의 것인지가 애매해졌다. 이런 상업구조까지 거부하는 '더 나쁜 여자'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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