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중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해?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3.07.16. 00:00
별 생각 없이 TV를 보고, 노래를 듣는 것 같지만, 그럴싸한 해석을 달아 놓고 보면 대중문화 속에서는 사회의 현주소가 보이고 사람들의 인식이 보고, 심리가 보인다. 별 생각 없이 접하는 것 같은 대중문화에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별 별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그걸 콕콕 짚어내는 하재근 문화평론가의 '컬쳐 톡'이 매주 수요일, 여러분을 찾는다. |
[서울톡톡] 최근에 10대에 의한 잔혹한 살인사건으로 온 나라가 놀랐다. 19살인 피의자가 친구 소개로 알게 된 10대 여성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사건이다. 단지 살해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맨 정신인 상태에서 공업용 커터칼로 시신을 무참히 훼손해 수사관마저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이 터진 후 피의자가 '영화처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심각한 범죄 사건이 터진 후엔 언제나 이런 보도가 나온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 요즘엔 특히 게임이 많이 거론된다. 이런 범죄의 원인이 잔혹한 영화 때문이며, 10대는 영화 같은 대중문화 작품을 모방해 문제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이런 기사의 근저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생각의 틀을 '프레임'이라고 한다. 이 범인과의 일문일답 기사를 자세히 보면 기자가 처음부터 대중문화 영향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유도심문 하듯이 답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먼저 잔인한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그런 영화대로 실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피의자는 '한번쯤은'이라고 답했다. 기자는 또 공포영화 <호스텔>을 봤냐고 묻고, 거기에서 시신 훼손하는 장면에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피의자는 '그냥 이런 영화도 있구나' 정도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것이 '영화처럼 해보고 싶었다'는 식으로 기사화된 것이다. 이런 식의 보도는 거의 정형화된 패턴이다. 과거에 10대 소년이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땐 게임의 영향이 문제라는 식으로 보도가 나왔었다. 엽기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언제나 범인이 평소 어떤 대중문화 작품을 접했었는지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런 보도 태도에 문제는 없는 걸까?
대중문화의 폭력성이 사람의 폭력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맞다. 과거에 폭력 비디오를 본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더 폭력적인 놀이를 한다는 실험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조건에서 모든 사람들이 대중문화작품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범죄 영화를 본 모든 아이들이 다 범죄자로 커서 이 세상이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 폭력물을 보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폭력적 대중문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취약한 이들이다. 아이들의 경우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거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을 때, 친구 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때 등 취약한 상태일 때 외부자극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다.
범죄가 터질 때마다 대중문화를 문제 삼는 태도는 바로 이런 대목, 즉 아이들을 취약한 상태로 만든 사회적 조건의 문제를 희석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 아이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 어른들의 잘못은 은폐하면서 모든 원인을 손쉽게 대중문화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런 식의 태도로는 결코 문제를 치유하거나 예방할 수 없다. 설사 대중문화가 모두 사라져도, 이미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정신이 취약해진 아이들은 결국 사고를 칠 것이다.
이번에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10대의 경우, 지난 해에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즉, 이미 심각한 불안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10대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가를 따져봐야 문제의 근원이 보인다.
한국사회는 교육을 포기한 지 오래 됐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경쟁 괴물로 키워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을 전전하다 별 보고 집에 들어오는 아이들이다. 어떻게 인성이 길러지겠는가? 그 아이들이 요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왕따 사건들을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어른들은 승자독식, 갑의 횡포 등으로 아이들에게 비정한 역할 모델이 되어왔다. 이번에 사건을 저지른 10대도 자기 입장만 중요했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른들을 보고 배운, 우리가 만든 괴물인 것이다. 대중문화 탓이 비겁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