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의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시민기자 이나미

발행일 2014.06.13. 00:00

수정일 2014.06.13. 00:00

조회 1,525

[서울톡톡] 1987년 6월 9일, 박종철 열사 고문사건 은폐에 항거한 시위가 대학 캠퍼스에서 열렸다. 그 시위 현장에서 머리에 피를 흘린 한 청년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피격을 당한 것이다.

청년은 근처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피격 27일 만인 7월 5일, 결국 생을 달리했다. 한 청년의 죽음은 당시 국민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시위에 참여하는 국민들은 늘어갔고 뜨거운 국민적 저항 끝에 결국,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회복의 도화선이 된 그 청년, 바로 이한열(1966~1987년, 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 열사다.

1987년 7월 9일 신촌을 시작으로 시청으로 이어진 이한열 장례식 행렬 장면으로 박물관 내 영상 중 한 장면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캠퍼스에 안에 위치한 `한열동산 조형탑`

SNS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현재와 달리, 1987년은 오로지 몸으로 사회를 향한 관심과 시민권리를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고(故) 이한열 씨가 '이한열 열사'로 우리에게 기억된 지도 올해로 27년을 맞았다. 해마다 6월 9일이 되면 고인의 모교 연세대는 이 열사를 기리는 추모제를 열어 왔다

올해는 추모제와 함께 마포구 노고산동에 위치한 '이한열기념관'에서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기념관을 운영하는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지난 2013년 '크라우드 펀딩' 등으로 모금한 5천여 만 원으로 유품 보존작업과 박물관 등록을 진행하였고, 박물관으로 재개관식을 열었다.

박물관으로 재개관 한 이한열기념관

특히 4층 상설전시관에선 고인이 피격 당시 입고 있던 티셔츠와 청바지, 짝 잃은 운동화, 소지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최초로 고인의 육필이 담긴 일기장과 유년시절 사진들도 공개되었다. 이외에도 3층 전시관은 1년에 3회 특별전시가 열리고, 1층은 이한열 열사의 유품이 보관될 수장고가 마련되었다.

최루탄에 맞았을 때 입었던 티셔츠와 청바지, 이 유품들은 특수 처리 과정 거친 것으로 오는 7월 9일까지 관람객에게 공개한 뒤 이후에는 복제본을 전시할 계획이다., [열사에서 친구로]전

한편 3층에서 열린 특별전 <열사에서 친구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작가들이 80년대와 이한열 열사를 그려 본 전시다. 7월 9일까지 열리는 전시는 재개관과 더불어 '열사'라는 과거의 상징을 동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젊고 새로운 이미지로 개편하고자 마련됐다. 동시에 특별전은 '이한열'을 중심으로 세대 간의 교차와 '청춘'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전시 기획자인 이민지 큐레이터는 "과거의 청년과 지금의 청년의 삶은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들이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조카와 삼촌으로, 제자와 스승으로 연결되어 있고, 계승되고 있다. 이 연결 고리들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틀어본다면 차가운 비난을 넘어 서로의 취약함을 보듬어 주는 따뜻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획의도를 전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에 대한 국가보상금을 기부한 후원자의 지원금으로 마련되었으며, 민중미술작가 박경효, 팝아티스트 강영민, 임경섭, 낸시랭, 차지량, 홍태림 등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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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6월항쟁 #이한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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