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남자

시민기자 김종성

발행일 2013.09.02. 00:00

수정일 2013.09.02. 00:00

조회 1,551

[서울톡톡] 과거 나루터 '양화진'이 있었다는 한강가 양화대교 옆에는 절두산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원래 이름은 생긴 모양이 마치 '누에가 대가리를 치켜든 것 같다'해서 '덜머리' 또는 '잠두봉'이라는 정다운 것이었다. 성당이 자리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주변의 한강일대가 잘 보인다. 경치 좋은 명당자리이기도 한 절두산은 옛날 옛적엔 풍류객들의 놀이터였다. 지금 그곳 한 켠엔 구한말 우리나라에 선교하러 왔다가 이 땅에 묻힌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공원이 있다. 특별히 신앙이 없는 나도 비석을 보고 있으면 고인들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곳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은 우리네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다양한 생김새의 비석들이다. 십자가 모양에서 네모 반듯한 묘비가 있는가 하면 울퉁불퉁한 바위처럼 생긴 것들도 있다. 더구나 몇몇 비석엔 심상치 않은 상흔이 있다. 물어보니 6.25 전쟁 때 생긴 총탄자국이란다.

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시작된 때는 1890년으로, 처음 묻힌 사람은 존 헤론 (John W. Heron)이라는 분이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헤론은 당시 창궐하는 천연두, 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마구 죽어나가는 조선사람들을 보다 못해 일선에서 열심히 치료하다가 그 자신이 전염병 이질에 걸려 1890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러 비석 중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써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는 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의 무덤으로 그는 선교사로 조선에 왔지만 교육과 계몽활동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사를 워싱턴에 보냈는데 그가 바로 헐버트다. 그는 1907년 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에도 밀사로 파견되었다. 해방 후인 1948년에는 84세의 고령의 나이에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으로 초대되어 광복된 한국이 보고 싶어 왔다가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선교사이자 언론가인 헐버트는 1886년 7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 지리 등을 가르쳤다. 이후 육영공원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잠시 귀국했던 2년간을 빼고, 1907년까지 약 20여 년 간을 한국에 머물면서 교육과 언론 사업을 펼쳤다. 개인교사에게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고 한글 로마자 표기법도 고안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마포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무덤 옆에 있는 작은 묘석에는 이런 글이 써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 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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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절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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