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성당보다 먼저 세워진 성당이 있다?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나미

발행일 2013.02.05. 00:00

수정일 2013.02.05. 00:00

조회 4,136

[서울톡톡] 리포터는 1998년 2월 12일자 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던 한 '사건'을 잊지 못한다. 사건 내용은 11일 서울의 한 작은 성당에서 일어난 화재였다. 그때 본 성당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정감이 있었다. 명동주교좌성당(이하 '명동성당')의 웅장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여기까지가 그 성당의 역사를 알기 전의 감정이었다. 이후 알게 된 그 성당은 명동성당보다 5년이나 앞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교회 건축물'이었다. 화재는 한 성당의 소실 차원이 아니었다. 당시 105년(현재 121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 천주교의 상징물'이 무너진 것이었다.

화재 후 15년이 지났다. 바로 그 화재를 입었던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제252호, 서울시 중구 중림동 149-2번지)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성당으로 가려면 먼저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4번 출구로 나와, '한국경제신문' 사옥을 향해 10분 정도 걷는다. 사옥 옆에는 생선냄새가 남아있는 중림시장 골목이 있다. 성당은 충정로역에도 가깝지만 서울역 뒤에도 위치한다. 성당 주변은 시장과 함께 '서부중앙의원' 건물과 '염천교 구두거리' 등이 있다. 이 주변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지만, 서울의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시장 골목을 걷다보면 서부중앙의원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 바로 옆에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뾰족한 종탑을 내밀고 있는 성당이 서 있었다. 성당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성당은 십자가 구조로 이뤄진 건축물로, 마감재인 벽돌의 색은 바래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만일 성당의 정보를 모른다면, 벽돌 상태만 보고 새로 지은 성당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이 성당 바로 옆에는 서소문순교자 기념관, 서소문 순교성지, 약현의 집, 사제관, 가톨릭 출판사 등이 들어서 있다.

약현성당이 세워진 이유는?

조선시대 사소문 중 하나인 서소문(현재 중앙일보 사옥과 순화빌딩 사이의 대로 가운데에 위치) 밖에는 죄인을 공개 처형하는 사형장이 있었다.(사형장은 현재의 '서소문 공원' 북동쪽 모퉁이 부근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박해로 처형된 100여명의 천주교 신자 중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1756 ~ 1801)을 포함한 44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1886년(고종 23년) 한·불 수호조약이 체결된 뒤 드디어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이때 한국에서 천주교를 주도한 파리 외방선교회의 프랑스 신부들은 박해시절 인연이 깊었던 이 부근의 땅들을 사들여 성당의 터전을 삼았고, 많은 종교 시설들을 지었다.

그때 양반과 지식인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고자 순랫골(현재 순화동)에 위치한 '약현'(약밭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불린 명칭) 언덕에 강당을 지었다. 이 언덕은 사형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이후 신자 수는 점차 명동본당을 넘어섰다. 더 이상 강당으로는 신자들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많은 신자를 수용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 세워진 것이다.

성당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자 부주교였던 코스트(Georges Coste 1842~1896) 신부가 설계를 맡아 1892년(고종 29년) 12월 2일 완공되었다. 1905년에는 종탑이 세워졌고, 1974년에는 대규모로 보수공사를 한 바 있다.

화재 후, 옛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약현성당

약현성당은 길이 32m, 폭 12m, 탑 높이 22m의 건축물이다. 성당 외부 정면에 해당하는 곳 위에는 종탑이 있다. 내부는 지상 1층에 120평 규모이며, 공간은 좌우 열주에 의해 3개열로 구분되는 삼랑식(몸채에 곁채 2개가 딸린 라틴십자형) 평면구성으로 되어있다. 창은 반원아치형이며, 내부 중앙에 위치한 천장은 갈빗대 모양의 뼈대가 있는 뾰족한 궁륭천장(반원 모양으로 둥그렇게 만든 천장) 형태다. 종탑이 있는 쪽 반대편에 위치한 성당 외부 배면(위치상으로 건물 등 쪽의 면)은 좌우로 현관문이 있다. 그 가운데에 반원 모양의 벽면이 색 유리 타일로 장식되었다.

성당은 명동성당과는 크기와 외형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이 성당이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것과 연관이 있다. 성당은 왜 이 두 가지 양식이 적용된 것일까?

이유는 바로 높은 공사비에 있었다. 만일 고층규모인 고딕양식으로 설계를 하면, 공사비는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국의 건축은 고딕양식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경제적, 기술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을 절충할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이 두 가지 양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한편 15년 전 화재 당시, 성당은 외부의 경우 벽돌 구조물이, 내부는 앙상한 잔해뿐 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후 1년 6개월에 걸친 복원 공사가 이뤄졌다. 특히 복원 공사는 성당 완공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다는 원칙을 세웠다. 복원 공사 후 성당은 1974년 보수 당시 변형되었던 부분이 원래의 상태로 복구되었다.

지금의 성당은 화재 전의 성당보다 초창기 성당의 모습에 더 충실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근대 서양식 건축에 영향을 준 문화유산

약현성당은 1900년 이전의 몇 안되는 서양식 건축물 중 일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서양으로부터 수용된 것이다. 이 점에서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 근대 건축사'에 중요한 가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 성당은 명동성당 건축에 앞서 교회 건축과 서양 건축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선택되어 시험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으로서 이후 국내에 지어진 서양식 성당은 물론 병원, 학교, 관청건물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약현성당은 100여년에 걸친 박해를 극복한 선조들의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실현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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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 #가톨릭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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