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안 민가의 진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장제모

발행일 2013.01.04. 00:00

수정일 2013.01.04. 00:00

조회 2,596

[서울톡톡]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에는 사대부가(士大夫家)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전각이 있다.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장자인 효명세자(1809~1830, 후에 익종, 문조로 추존)가 부모인 순조와 순원왕후(김씨)를 위해 건립한 연경당(演慶堂)이 그것이다. 이 전각은 사대부가, 즉 민가를 흉내 낸 집이라 궁궐의 전각에 의례 치장하는 처마 등의 단청도 하지 않는 등 소박한데, 민가와 다른 점은 민가는 99칸을 넘지 못하지만 이곳은 궁궐이라 그런지 120여 칸에 이른다.

기록에 의하면, 연경당의 건립 시기는 1828년(순조28년)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의 연경당은 고종(1868년)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효명세가가 부친 순조가 와병중이라 대리청정(1827-1830) 중 양친을 위해 지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 목적은 여러 해석을 하게 하는데, 리포터는 효명이 부모님의 안식처로서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당시 순조는 친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하여 사실상 자신이 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경당의 구조를 살펴보면 사대부의 살림집을 본떠 아버지인 순조가 거처할 사랑채, 어머니인 순원왕후가 거처할 안채와 그 외 여러 부속 건물이 있는데 이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연경당이다. 그러나 현재 연경당이라 부르는 공간은 그것(사랑채)를 포함한 전체의 건축공간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자. 기록에 의하면, 연경당은 효명이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하는데, 효명이 왕이 되기도 전에 이러한 목적의 건축물을 지으면서 왜 사대부가를 흉내 내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어떤 역사로 연결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그것이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궁궐 안에 민가를 지은 것은 바깥나들이 기회가 적은 왕자나 공주 등에게 민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하나 이는 기록의 사실도 아닌 만큼 후세의 추정일 뿐이라 생각한다.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대리청정 3년 만인 1830년(순조 30년)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이어 4년 후인 1834년 순조도 사망함으로 효명의 장자가 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이분이 헌종(1834∼1849)이다. 순조 사후 7살의 어린 헌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필연적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요구되었고 그 역할을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가 맡게 되었는데 이분이 다름 아닌 안동김씨 세도의 시초를 마련한 김조순의 딸이다. 다시 말하면, 이때부터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그 기원은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런가 하면 사망한 효명세자는 1808년 익종으로 추존되면서 그 비인 풍양 조씨(조만영의 딸)는 왕후로 책봉되었고, 이 분 역시 아들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후사 없이 죽고 철종(1849~1863)때 순원왕후도 사망하게 되면서 대비의 신분으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왕위(고종, 1863∼1907)에 앉히는 등 3년여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친정 세력인 풍양 조씨를 정치 일선에 나서게 하였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헌종에서 철종에 이르는 시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친정 세력인 안동김씨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 들였고, 다시 순원왕후 사후에 익종(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도 수렴첨정을 하면서 친정세력인 풍양 조씨를 역시 정치일선에 나서게 하면서 사대부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연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두 분의 왕비는 모두 연경당을 건립한 효명세자와 모자로 부부로 관계가 있는 분들로 연경당이 일정기간의 생활근거였다 즉, 연경당을 생활근거로 하였던 두 여주인은 친정세력을 정치일선으로 불러 사대부에 의한 세도정치가 있게 하였다. 사대부가를 본떠 지은 연경당의 여주인들이 사대부에 의한 세도정치를 비롯케 한 주인공이었던 것은 역사의 우연(偶然)으로만 두기에는 역사의 전개가 너무 리얼하다.

세도정치를 극도로 경계하였기에 외가인 안동김씨와 처가인 풍양조씨 일문을 견제하던 효명세자였는데, 그가 죽은 뒤 추존이 되면서 부인 풍양 조씨가 왕비(신정왕후)가 되었고, 어머니인 순원왕후는 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외가인 안동김씨가 정치권력을 잡게 하였으며, 다시 순원왕후가 죽자 신정왕후도 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는 처가 세력인 풍양조씨를 득세케 하여 세도정치가 연속케 하였다. 그렇듯, 두 여인은 연경당의 여주인이고 조선 왕조역사에서 대를 이어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있게 한 주인공이다.

연경당을 지은 효명세자(문조)와 신정왕후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사적 제 193호)을 이루고 있는 수릉(綏陵)에 합장되어 있다. 부부는 사후에 만나 어떤 대화를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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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창덕궁비원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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