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눈을 감고 있네!
발행일 2012.11.16. 00:00
[서울톡톡] 손때 묻은 책장을 넘기다 툭 튀어나온 빛바랜 사진 같은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마치 옛 기억 속, 할머니 방 한쪽 벽에 빼곡히 모아둔 가족 사진 마냥 아련하다. 왠지 모를 향수에 젖어 가만 들여다보자니 어찌된 영문인지 사진 속, 아니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들 눈을 감고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안창홍 작가의 신작이다. 미술계의 이단아라 불리는 안창홍 작가의 작품이라니 다소 의아해지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수긍이 간다.
왠지 거북하고 부담스럽던 그간의 작품들과 달리, 별 거리낌 없이 작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오히려 깊숙이 다가가 사색에 잠기게 한다. 이전의 다소 불편했던 작품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한편 옛 사진을 통해 작가의 이야기를 덧입힌 방식은 그의 지난 그림들을 떠올리게 한다.
옛 사진에 담긴 작가의 시선을 만나다
오는 12월 9일까지 더페이지 갤러리에서는 안창홍 작가의 개인전 '아리랑'이 열리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그가 골동품 가게나 옥션 등에서 수집한 50년 이상 된 사진들을 기반으로 작업한 작품들이다. 70년대 후반 '가족사진' 연작을 시작으로 '봄날은 간다' 연작, '사이보그' 연작, '부서진 얼굴' 연작, '49인의 명상' 등의 제목으로 지속적으로 발표해오던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간 작가는 눈을 도려내거나 얼굴에 칼질을 하기도 하고 붉은 색을 덧칠하거나 갈가리 찢겨 부서진 익명의 얼굴들을 선보여 왔다.
"70년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제겐 평생 동안 끌고 나가야하는 운명적인 주제들이지요."
강남역 인근의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만난 안창홍 작가(59세)는 푸근한 옛 스승님 같은 모습이었다. 그간 그림으로 만난 상상 속 작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 다소 기괴하면서도 섬뜩한 작품을 그린 작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기념사진들만을 묶어 연작으로 첫 선을 보인다. 이전 작업들과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또 다른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동창회, 졸업, 결혼식 등 가족사진 속 이들은 교복, 한복, 웨딩드레스, 기모노 등을 입고 있다. 이들의 경직된 표정과 틀에 박힌 자세에는 자연스러움은 커녕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듯 인물과 인물과의 교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들은 눈을 감고 관객과의 교감마저 단절 시키고 있다. 대신 내면 더 깊은 곳을 바라보게 만든다. 박제된 이들 사진은 이제 관찰자의 생각이 더하여져 새롭게 다가온다.
보통사람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작가, 안창홍
"이들은 보통사람들의 인물사진입니다. 교과서로 대변되는 역사라는 것을 보면 영웅들은 권력의 야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역사를 배우게 되죠. 그런 역사의 주체가 보통사람이면서, 정작 역사 속에서 부재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의 감겨진 눈을 통해 역사 속 진정한 주체임에도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상황을 반어적으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에 초현실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적 성향의 그림을 시작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안창홍 작가는 특유의 비판적 시선으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표현하고 있다. 미대 진학 대신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의 예술을 선택한 그는 고졸학력, 비전공자, 마이너리티라는 수식어와 함께 현대미술계의 대표적인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말처럼 "썩 유쾌하고 가벼운 그림이 아닌" 다소 불편하고 도발적이며 때론 외설스런 작품들은 되려 평단의 호평과 많은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다.
인간 내면 깊숙이 숨겨진 본능이나 욕망에 관한 부정적인 측면들의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조롱하는 듯 한 도발적인 그림을 보여주던 작가. 그는 이제 그림에 담겨진 관객의 몫을 다할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그림 속 인물들의 감겨진 눈을 통해 이제 스스로 나름의 현실 읽기를 의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개인적 영달을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닌, 공인으로서 사회적 책무가 있습니다."
역사를 꿰뚫어보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진정한 작가 정신을 강조하는 안창홍 작가. 그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작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리랑은 1000년 가까이 민족의 애환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그리고 또 한국의 정서와 흥과 그리고 슬픈 한이 잘 녹아 있는 곡이지요."
민족의 노래 아리랑에 대한 그의 생각처럼,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 '아리랑' 시리즈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광기어린 역사 뒤안길에서 애당초 없었던 듯이 허깨비처럼 사라져간, 아니면 이 순간 노구를 이끌고 생의 마지막 언저리를 더듬고 있을 이들의 지난한 삶에 대한 연민을, 한과 상처를,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이 시대의 야만과 불길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 안찬홍, 아리랑 2012 전시도록 중에서.
■ 관람 안내 · 입장료 : 3,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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