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무과시험장, 훈련원 터
발행일 2012.03.30. 00:00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안내판 중 하나가 무슨 무슨 훈련원이다. 훈련원이라는 이름을 쓰는 곳은 대부분 직업훈련이나 종교계 정신훈련을 하는 곳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훈련원이라는 이름은 결코 흔한 이름이 아니었다. 한양 도성에 오직 한 곳만 있었던 특별한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정문을 들어서 본관 입구로 다가가면 화단 앞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서있다. 표지석에는 '훈련원 터, 태조 1년(1392)~고종31년(1894) 군사의 무예훈련, 병법교습 및 무과 과거시험 등을 맡아보던 관아자리'라고 쓰여 있다. 그럼 당시의 훈련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아하던 관아였으며 조정안에서의 위상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훈련원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정 3품 아문으로 서반인 무관이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과거시험 중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을 주관하였고, 군사들의 무예를 연마시키며, 무경칠서와 박의, 진법 등 병법을 가르치는 일을 관장하였다. 표지석의 안내문처럼 1392년에 설치하여 훈련관이라 부르다가 1467년 훈련원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었다.
이순신의 무과시험장이었던 훈련원
"어이쿠,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달리던 말과 함께 쓰러진 젊은이는 속으로 탄식을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려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과녁을 향하여 활시위를 힘껏 당기다가 아차 하는 순간 말과 함께 넘어져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고통을 참고 일어났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근처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부러진 다리를 싸맸다. 그리고 다시 말위에 올라 시험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젊은이는 27세 청년 이순신, 선조 5년인 1572년 훈련원별과 무과시험장인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576년 2월, 이순신은 다시 이곳 훈련원에서 치룬 식년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는 31세,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해 12월, 그는 벼슬길 첫 임지를 찾아 떠났다. 함경도 동구비보(지금의 함경도 삼수갑산지역)의 무관말직인 권관(종 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참으로 험준한 변경이었다. 이순신의 일생은 전 생애가 그렇지만 이때부터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익과의 악연으로 훈련원에 쫓겨난 이순신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국경을 자주 침입하는 북방민족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세월이었다. 첫 임지에서 만기를 채운 뒤 1579년 2월 한양으로 올라와 종 8품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3년 만에 2계급 승진했지만 여전히 미관말직이었다. 험한 변경에서 돌아왔지만 이곳 훈련원에서도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의 곧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상사이며 실세인 병조정랑(정 5품) 서익이 측근을 특진시키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부당하다고 반대한 것이다. 부당한 정실인사라는 이순신의 주장은 정당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방군관으로의 좌천이었다. 이곳 훈련원에 부임한지 8개월 만에 그렇게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으로 쫓겨난 것이다. 군인사권을 쥐고 있는 핵심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 8품 하급군관이 반대한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돌아온 것은 역시 부당한 인사조치인 좌천이었다. 그는 억울했지만 군말 없이 새로운 임지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렇게 쫓겨난 이순신에게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행운이 찾아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에게 파격적인 승진 인사가 단행된 것이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지금의 전남 고흥군) 수군만호(종 4품)로 임명된 것이다. 당시의 직급체계는 정 1품에서 종 9품까지 18등급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종 8품에서 종 4품관이라면 무려 8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른, 정말 놀랍고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이다.
파격적인 승진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악연
세상만사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순신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되풀이 된 것이다. 전에 병조정랑으로 이순신과 악연이 있던 서익이 군영의 병기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수군진영을 돌아보고 간 것이다, 더구나 조정에 보고된 그의 보고서는 매우 악의적이었다.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고 방치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파격적으로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2년 전의 관직인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억울하고 서글픈 귀경이었다.
훈련원 공원 조성으로 옛 모습 살아날까
훈련원의 임무는 크게 시취와 연무, 두 가지였다. 시취는 과거인 무과와 함께 매년 봄·가을에 실시되는 도시의 경우, 중앙에서는 병조와 훈련원의 당상관이 담당하였다. 그 밖에 내금위, 별시위, 친군위, 등의 시취도 훈련원이 주관하였다. 연무는 병서들을 습독하는 걸 포함해 훈련원이 군사력의 유지·발전을 위해 주력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중앙에서 매달 두 번씩 실시되는 습진에 훈련원이 간여했다. 특히 봄과 가을에 실시되는 겸사복, 내금위, 충의위, 족친위, 장용위의 병기 검열을 주관하였다. 구체적인 전술의 연구와 교습도 훈련원의 임무였다.
이렇듯 조선시대 훈련원 터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으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의 꿈과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요즘 봄철을 맞아 국립중앙의료원 옆 공터에서는 '훈련원 공원' 조성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원공사가 끝나면 어떤 모습으로 옛 훈련원을 떠올려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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