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당! 문답, 누가 시작했나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3.09. 00:00

수정일 2012.03.09. 00:00

조회 2,868

본래의 맹사성집터인 박물관 벽화와 집터표지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왕족과 고급관료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두 궁궐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을 가진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의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계동 일대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다. 북촌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는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의 집터 표지석이 서있다.

표지석에는 ‘맹사성 집터, 조선조 세종 때 정승을 지낸 청백리가 살던 집터, 그의 이름을 따서 맹감사현, 맹현이라고 하며 퇴청하면 이곳에서 피리를 즐겨했다’고 쓰여 있다. 고불 맹사성의 본래 집터는 골목으로 20여 미터 더 안쪽에 있는 동양사박물관이며 마당에 서있는 벽화가 참 특별하다, 집터였던 박물관 벽에도 ‘고불 맹사성 집터,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효자요 청백리였던 고불 맹사성 대감께서 사셨던 집터’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맹사성의 집터를 찾은 날은 날씨가 아직 풀리기 전이어서 매우 쌀쌀했지만 몇 사람의 탐방객들이 집터 표지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맹사성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니 젊은 커플이 “그럼요, 황희 정승과 함께 청백리로 유명한 분이잖아요” 하고 망설임 없이 선뜻 대답한다. 만약 이 표지석 앞에 맹사성이 서 있다면 농담 한번 해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농담요? 못할 것 같은데요. 높은 대감이잖아요? 그리고 깐깐하고, 근엄하고, 너무 점잖은 분이어서 감히 말도 못 붙일 것 같은데요, 하하” 하고 멋적게 웃는다.

그럼 맹사성은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역사적 격변기를 슬기롭게 살았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맹사성,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고려 말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대립각을 세우고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최영장군이 바로 맹사성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멸망과 이성계의 추종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인 최영을 보며 초야에 묻혀 은둔하려했던 맹사성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에 의하여 그는 조선왕조에 출사를 하게 된다.

곧은 성품 때문에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벼슬길에 다시 나온 그였지만 태종임금 때는 하마터면 죽을 뻔한 위기도 넘겼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 시절 이야기다. 지평 박안신과 함께 평양군 조대림(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남편)이 중한 범죄에 연루된 것을 알고 그를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엄하게 문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 했던 태종의 큰 노여움을 샀다. 감히 임금의 사위인 부마를 함부로 문초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태종에 의해 처형당할 위기는 영의정 성석린의 간곡하고 적극적인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성품이 곧았지만 온화하고 검소했던 그는 세종임금 때 벼슬길의 정점에 올랐다.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벼슬이 최고위직에 올랐음에도 변함없이 가난했다. 그가 우의정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여름 날 지금의 국방부 장관격인 병조판서가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방안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런데 지붕에서 빗물이 새는 바람에 두 사람은 방안에서 삿갓을 쓰고 앉아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우의정대감의 사는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간 병조판서는 자신의 집 행랑채를 부숴버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맹사성은 부모님이 사는 온양을 자주 찾았다. 그는 하인 하나만 데리고 소를 타고 다녔다. 민폐나 관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허술한 옷차림에 소를 타고 오가는 그를 알아보는 지방관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양성과 진위 두 지방현감이 소식을 얻어들었다. 그에게 잘 보여 승진이라도 해보겠다는 욕심으로 온양 가는 길 연못가 정자나무 밑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웬 허술한 노인이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현감들은 못마땅하여 하인들을 시켜 소타고 가는 노인을 무례하고 거만하다며 꾸짖었다.

그런데 현감의 말을 전해들은 노인은 그 하인에게 이르기를 "내 소타고 내 마음대로 나들이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나는 온양에 가는 맹고불이라고 현감에게 여쭈어라" 말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두 현감은 그제서야 맹대감의 호가 고불인 것을 알아차리고 혼비백산하여 허리띠에 차고 있던 관인을 연못에 빠뜨려 잃어버렸다. 인침연이라는 연못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공? 당! 문답, 유머러스한 청백리 재상

점잖은 대감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맹사성이 고향방문을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주막에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를 만났다. 글깨나 한다고 으스대는 선비를 보고 맹사성이 “어디를 가는 공?” 하고 물었다. “과거보러 한양 간당.” 하고 선비가 대답했다. 이른바 ‘공당문답’이라는 이야기다. 맹사성이 다시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공?” 하고 묻자 그 선비는 남루한 노인을 비웃으며 “그럴 필요 없당” 하고 무시했다. 그리고 후에 그 선비가 과거의 말석에 들어 우의정에게 인사를 하려고 엎드렸는데 “과시는 잘 치렀는 공?” 하고 묻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기절초풍을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맹사성의 집에서는 경복궁이 빤히 내려다 보였다. 그래서 밤이면 대궐의 세종임금 방에 불이 꺼지지 않으면 “전하께서 아직 침수에 들지 않으셨는데 신하가 어찌 먼저 잠을 잘 수 있단 말이냐”며 먼저 잠드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세종임금도 “노 대신이 아직 잠들지 않았는데 어찌 아직 젊은 과인이 먼저 잠들 수가 있겠느냐”며 잠을 청하지 않았다는 군신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도 맹사성의 집터다. 맹사성의 집터로 가는 길은 북촌의 중심부를 지나는 길로 ‘북촌1경’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한옥골목도 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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