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개혁정치, 종로에 잠들다
발행일 2012.02.07. 00:00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조선 중종시대의 출중한 학자이며 개혁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가 살던 집터 표지석이 인사동 입구 돈의동에 있다. 낙원 악기상가 앞, 거리 가운데 화단에 그가 살던 집터 표지석이 외롭게 서있다. 거리 좌우에는 ‘낙원떡집‘과 ’종로떡집‘이 마주 서있는데 그 중간 도로 가운데 지점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개혁정치를 꿈꾸었던 그의 꿈도 그곳에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
성급한 추진으로 실패한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궁궐 안에서 참으로 해괴한 일이 생겼사옵니다”
어느 날 임금에게 궁중 내관이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뢰었다. 그러나 내관은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라는 임금의 다그침이 있고서야 내관은 아뢰는 대신 멈칫멈칫 손에 들고 있던 넓적한 나뭇잎을 받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나뭇잎을 받아든 중종임금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때는 1519년 조선11대 중종 임금시절,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이 재위 14년째를 맞은 해였다. 중종이 내관에게서 받아든 나뭇잎에는 벌레가 파먹은 듯한 형상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글자를 풀이하면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상적인 개혁정치 실현을 추구했던 조광조 등 사림파 신진사류들이 떼죽음을 당한 기묘사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반정의 성공으로 폭군 연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연산군 시대의 잘못된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현코자 한 것이다. 중종은 먼저 연산군시대에 일어난 몇 차례의 사화로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폐지되었던 조선조 유학의 상징인 성균관을 다시 원상 복구했다.
조광조는 연산군시절의 잘못된 정치를 청산하는 개혁정치 실현을 추진했지만 중종은 유학을 진작시키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또한 연산군에 의해 귀양을 갔던 유숭조 같은 선비들을 복권시켜 중용했다. 그러나 중종은 즉위 초반에는 반정 공신들의 노골적인 견제로 인해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다.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단경왕후)도 지키지 못했을 만큼 왕권은 허약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8년여가 지나고 주요 반정 공신들이 하나 둘 사망하면서 왕권은 강화되었고, 본격적인 정치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때 중종이 주목한 인물이 바로 당시 사림의 영수로 있던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함경도 지방 지방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에서 사는 동안 마침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소학군자’라 칭송을 받던 김굉필을 만나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대표적인 문하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암 조광조는 중종5년인 1510년 소과인 생원시를 거친 후,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정치에 깊이 간여하면서 이상 정치, 도학정치로의 개혁을 실현하려 시도한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른바 과거제도의 개혁인 현량과를 비롯한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과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개혁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 신진사림세력은 대부분 젊은 층이었다. 따라서 그만큼 치밀함이 부족하여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실현에만 급급했다. 너무 성급하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반정 훈척 세력인 남곤이나 심정 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이른바 위훈삭제운동으로 알려진 중종반정 공신 중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훈구파들은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한다. 이들은 은밀하게 궁중의 숲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네 글자를 쓴 뒤, 벌레가 갉아먹게 한 것이다. 마침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것이다. 더구나 중종은 당시 신진사류의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결국 중종은 위훈삭제 주장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을 조정에서 내치는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조정에서 쫓겨난 조광조는 김정,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투옥 당시 그도 김정, 김식, 김구와 함께 즉시 처형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결국 훈구파의 김전, 남곤, 이유청이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그해가 바로 기묘년이었다.
향교동, 혹은 한양골 집터가 지금은 떡집 거리로
조선 중종시대의 출중한 학자이며 개혁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가 살던 집터가 지금은 돈의동 낙원동 경계지역인 인사동 입구에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낙원 악기상가 앞, 거리 가운데 화단에 서있는 집터 표지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낙원상가와 떡집을 드나드는 어느 누구도 그 자그마한 표지석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곳이 조선시대 그 유명한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집터였네요.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도로 한복판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길을 건너던 시민이 다가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조광조의 집터가 도로 한복판에 있지?” 또 다른 행인은 집터 표지석이 도로 한 복판에 있는 것이 몹시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며 개혁정치를 꿈꾸었던 정암 조광조의 집터가 왜 도로 한복판에 남아 있는지 사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사에 전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버렸거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나신균 주무관의 말에 의하면 집터 표지석은 고증을 거쳐 1987년에 서울시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표지석을 가만히 보면 아랫부분에 한양골 집터라는 글이 쓰여 있다. 옛 문헌《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향교동에 조 정암(조광조의 호)의 옛 집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한양향교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곳의 옛 이름이 향교동 혹은 한양골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루지 못한 개혁정치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 복잡한 도시의 한가운데, 종로에서 작아져버린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며 차가운 표지석의 표면을 가만히 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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