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에는 연변이 있다
admin
발행일 2010.06.01. 00:00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바퀴.' 그렇다면 나팔꽃과 바둑이 대신 ‘양꼬치’와 ‘연변 아주머니’가 반겨주는 동네 한바퀴는? 바로 ‘가리봉동 동네 한바퀴’다. 금천예술공장의 작가들이 펼치고 있는 공동체 예술작업인 ‘커뮤니티 아트’, 그 일환으로 이수영, 리금홍 듀오 작가가 진행 중인 체험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남구로역에서 가리봉동 골목 깊숙히까지, 이렇게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을 거라곤 누구도 상상 못했다. 쭉 늘어선 음식점들 간판은 모두 간자체 한자로 쓰여 있고, 좌판에 내놓고 파는 음식들은 뭔가 조금씩 낯선 모양과 냄새로 눈과 코를 자극한다. 거리에서 흔하게 들려오는 중국어는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잠시 헛갈리게까지 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가 가리봉동이란다. 이 곳을 구로공단 시절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고, 젊은 세대들은 그저 가산디지털단지로 더 익숙하겠지만, 이 가리봉동에 이렇게 섬처럼 고립되어 숨쉬고 있는 ‘연변 거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까. 모두 흥미로운 마음으로 투어를 시작했다. 여기가 바로 연변 거리 언뜻 보면 여느 동네들처럼 슈퍼, 미용실, 식당, 옷가게 등이 오순도순 자리한 가리봉 메인 거리. 별다를 건 없다고 생각하려는데, 예전에 이 곳에는 공중전화기가 쭉 늘어서 있었다고 이수영 작가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게 바로 이주자들 거리의 특징이에요. 다들 이곳으로 모여들어 고향에 전화를 거는 게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 거리가 일명 ‘연변 거리’의 메인이 되었죠.” 백 년 전 국경을 넘어 먼 북쪽으로 떠났던 조선족들. 그러나 드넓은 중국 땅에서 조선족은 그저 힘 없는 소수민족에 불과했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수교가 시작되면서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은 이곳 가리봉동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한국 땅은 그들에게 늘 오랜 세월 동경의 대상이었을 테지만, 이곳으로 다시 이주해온 그들에게는 또 다른 그리운 고향이 있었다. 그 그리움을 마주하며 살고자 애쓴 흔적은 ‘연변 거리’를 형성하게 됐고, 이렇게 그들의 삶은 조금씩 정착하게 되었다. ‘양(羊)꼬치구이’ 먹어 보셨어요? 백년의 세월 동안 그들의 문화는 비슷한 듯 많이 달라졌다. 음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거리의 식당들에서는 입쌀벤세, 소배필, 배골돈두각, 토닭곰 등 이름만 들어도 생소한 음식들을 팔고, 가리봉 거리를 쭉 걷다 보면 오른편에 ‘중국동포타운센터’라고 쓰여진 시장에서는 영채김치, 줄콩, 작소다, 식용잿물 등 모양과 이름은 우리의 음식과 비슷하지만 맛은 전혀 다른 음식들이 진열돼 있다. 먹거리 속에서 여러 문화와 민족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주를 거듭해 온 그들의 삶의 지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은 ‘양(羊)꼬치’. 이수영, 리금홍 작가는 몇 년 전 우연히 이 양꼬치구이를 먹어본 것을 계기로 가리봉동을 기록하는 여러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 먹어 본 양고기와 향신료는 북간도를 거쳐 신강 우루무치와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날아올라 풍문으로만 듣던 기억들을 불러냈습니다. 다시 양꼬치구이가 먹고 싶어 연변거리에 갔죠. 그 곳에서 우리는 그 풍문들이 만들어 낸 기억의 틈들을 보았습니다.” 결국 다 같이 한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메뉴판이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직접 음식을 보고 손짓을 해서 주문을 했다. 무난하게 튀김종류와 감자볶음 쌈을 시킨 다음, 튀김을 콩물에 찍어 먹는 특유의 방식도 따라해 보고 감자볶음을 밀전병 같은 것에 싸서 먹어보았다. 입맛에 잘 맞진 않았지만 다들 외국여행 중에 식당에 들린 기분이라며 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가리봉 쪽방 208호 시장을 지나 언덕길 골목을 몇 번 꺾자 가리봉동의 쪽방촌이 보인다. 이번 투어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이 곳에 위치한 쪽방 208호. 작가의 안내를 받아 쪽방촌의 어느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안에 한 평 남짓한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중 맨 안쪽 방에 들어섰다. 다른 방은 실제로 조선족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고, 작가는 그 중 한 방을 얻어 이번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 마침 토요일이라 주민들 대부분이 일을 나가지 않으니 조용히 이야기하자는 말과 함께 쪽방 208호에서의 작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모티브로 등장해온 ‘쪽방촌’ 혹은 ‘벌집촌’이라 불리우는 이 곳. 왜 하필 이 곳일까 하는 질문에 이수영 작가는 방 한쪽 구석에 걸려 있던 ‘가리봉동 진달래반점’이라는 책을 꺼내보였다. (조선족들은 ‘진달래’라는 상호를 좋아한다. 그래서 많은 가게 들이 진달래란 이름을 갖고 있다.) 그 책에는 그동안 작가가 여기서 생활하면서 수집한 조선족들의 음식 사진과 주민들과의 인터뷰 내용, 쪽방촌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3대째 되었다는 조선족은 참 재미있어요. 재미있다는 의미는 그들의 삶이 보여주는 의미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죠. 사회적으로 참 많은 사정을 갖고 있는 민족. 오랜 이주 역사를 가진 민족. 그들을 우리는 조선족이라 부르긴 하지만 동포라고 하지는 않아요. 국적은 중국인이지만 중국에서도 힘없는 소수민족일 뿐이죠.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요. 동시에 한국에 대한 동경도 갖고 있죠.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남한의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통해 ‘국가’와 ‘민족’과 ‘시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거꾸로 되물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해요.” 이곳을 기억해주세요 1960년대 이곳에서 하루살이처럼 머물던 공장 근로자들이 지금은 경제성장을 이룬 주역으로서 4, 50대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쪽방촌은 그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족의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그들의 쉼터로 자리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가리봉동이 2015년이면 지역균형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어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안타까워 이 곳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해보자는 취지로 ‘가리봉 동네 한바퀴’ 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커뮤니티 아트라는 것은 함께 하는 체험이죠. 다른 작가 분들은 함께 벽화를 그리기도 하고 영상을 찍기도 하시지만, 저희는 그저 몸으로 하는 체험이 가장 오래 남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들이 일을 끝내고 퇴근해서 이 곳까지 걸어 들어와 신발을 벗고 쪽방에 올라오는 그 행위 자체, 그 삶 그대로의 서사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전부예요.” 조선족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 시대를 같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고향과도 같은 가리봉동. 이번 체험이 아니었더라면 영영 몰랐을지도 모를 이 고향을 잊고 싶지 않다. 눈에서는 사라지더라도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는 오래도록 남아 기억되길 바라본다.
시민기자/ 나영봉, 유화성, 이혜민, 조대현 (공동취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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