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시대에 성곽축조는 실명제였다
admin
발행일 2010.04.09. 00:00
동대문역사관에서는 성인 대상 답사 프로그램 '동대문 주변 서울 성곽 둘러보기'를 운영하고 있다. 이 탐방 프로그램은 전문가의 인솔 및 해설에 따라 동대문 주변 성곽을 도보로 둘러봄으로써 시민들의 서울 성곽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수준 높은 문화서비스다. 답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위치한 동대문역사관의 2간수문에서 출발하여 동대문, 낙산공원을 거쳐 혜화문에서 마무리하는 A코스와 동대문에서 광희문을 거쳐 장충단에서 마무리하는 B코스로 준비되어 있는데, 수강자가 원하는 코스를 선택하여 신청할 수 있다. 서울에도 올레길이 있다 A코스는 올레길이 제주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서울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코스다. 이곳은 낙산을 끼고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연결되는 2.1km의 성곽을 따라 폭 3~4m의 산책로 겸 역사탐방로다. 그날따라 유난히 화창한 봄 날씨에 걸맞게 개나리 철쭉 등이 만개한 성곽 주변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었다. 태조시대에도 실명제가 있었다 동대문 옆, 이화여대 부속병원 건물(지금은 철거됨) 뒤편의 새로 개통된 길을 따라가면 성벽이 나타난다. 이 성벽은 낙산을 정상으로 뻗어 있는 사적 제 10호로, 서울성곽의 일부다. 축성과정에서는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성벽 외측 석면에 군데군데 감독자의 성명, 군명, 자호 등을 새겨 넣었다. 최초의 성곽 축조는 49일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마무리되었는데, 농한기에 끝내려는 의도가 있어 견고성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도성 축성은 97 구역으로 나누어 6백 척을 1구역으로 하였으니 1,217 명이 180미터를 쌓은 셈이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천(天)’자에서 ‘조(弔)’자까지 구획되었다. 성곽을 보면「1패장 절충 성세각(一牌將 折衝 成世珏)」이라든지 「석수도변수 4월 오유선( 石手都邊手 四月 吳有善)」, 「강희 45년 4월 일개축(康熙 四十五年 四月 日改築)」이라고 새겨져 있어 숙종 32년(1706) 4월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성곽 개축공사로 872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수효는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공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에도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아 전라도에서는 14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하였다는 답사 전문 인솔 강사 박경룡(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씨의 해설에는 모든 수강생들이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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