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필! 나는 덕수궁 수문장이다
admin
발행일 2009.11.18. 00:00
70여 명의 남성과 3명의 여성, 우린 한 팀이다 가을이면 더욱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 우린 매일 이 담을 따라 태평소 가락에 맞춰 행진한다. 담 끄트머리,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이 있다. 우리가 들어서면 시선들이 일제히 쏠린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이국의 문화에 대한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저 시선……, 묘한 중독이 있다. 남자로써 어깨를 펴고, 배에 힘을 주게 만든다. 모두 일사분란하다. 모나리자처럼 미소를 지은 듯, 아닌 듯 표정 관리에 들어간다. 음악에 맞춰, 오른발! 오른발! 성큼성큼 걸음을 뗀다. 우린 덕수궁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나는 수문장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옛 덕수궁을 지키던 수문장을 재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현재와 과거를 하루 세 번씩 넘나든다.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 이렇게 세 번. 시청 별관 뒤, 부지런한 동료들이 의관을 갖춘 채 삼삼오오 모여 있다. 군대 못지 않은 규율이 있는 이곳. 남자들만의 세계, 출근 시간 엄수는 기본이다. 나와 동료들은 출근과 동시에 건강을 체크하고, 의관을 갖춘다. 복잡한 의관이 다 갖춰지면 상투를 틀고, 직책이 높은 사람은 수염도 붙인다. 이때 분장사가 있어 수염을 붙여주고 행사 중에도 한 번씩 점검해준다. 이곳에서는 동료인 분장사와 사회자 2명이 유일한 여성들이다. 그 외에는 주로 20대에서 30대 남성들로 구성되었다. 동료들은 크게 큰 깃발을 드는 기수단, 수갑과 곤장을 드는 수문군, 음악을 연주하는 취타대로 나뉜다. 맡은 역할에 따라 70여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우리의 하루는 의관을 갖춘 채 리허설로 시작된다. 현재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셈이다. 오른발을 기준으로 모든 동작을 연습한다. 혹시라도 틀리면 언제 보았는지 팀장의 호통 소리가 들려온다. 콕 집어내는 데에는 선수다. 모든 리허설이 끝나면, 잠깐 쉬면서 하루 스케줄을 전해 받는다. 그날의 날씨와 교통 등의 여건에 따라 대한문 앞에서만 하기도 하고, 종각까지 가기도 한다. 오늘도 종각까지의 행렬이 취소되었다. ‘세계 등불 축제’로 청계천이 복잡해졌기 때문. 대한문 앞에서 진행되는 행사만 있다. 우리 일은 특히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눈과 비가 많이 와도 취소된다. 한 여름엔 땀으로 목욕을 하고, 겨울엔 손가락과 발가락이 얼 정도로 추위와 싸운다. 이제 막 겨울의 문턱, 벌써부터 손가락이 시려오고 있다. 이런 추위에는 더욱 동작을 정확히 해야 한다. 몸이 추워지면 동작도 굳어져서 수문군으로써 권위가 안 서기 때문. 특히 몸이 얼지 않도록 방한복을 입는 것이 좋지만 우린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임시방편으로 한복 안에 다른 일상복을 겹쳐 입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복은 매력적이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겹쳐 입어도 옷맵시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여성 한복은 두꺼운 코트까지 껴입어도 절대 티가 안 난다. 그래서 날씨가 추울 때면 겹쳐 입는 방법이 최고다. 여름엔 어쩔 수 없지만. 때론 날씨가 힘들게 하지만 같은 자세를 40여 분 동안 하고 있는 것도 고역일 때가 있다. 곧게 세운 허리도 아프고, 각 세워 올린 팔 때문에 어깨도 저리기 일쑤다. 보통은 1년차 이상이 되어야 힘을 빼고 잡는 법을 터득하는데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 부들부들 들고 있는 수밖에. 곧이어 오전 교대식이 시작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부터 취타대의 연주가 울려 퍼진다. 길 가던 인근 회사원들도 이때는 잠시 멈춰 선다. 우리는 구령에 맞춰 앞으로 나아간다. 관광객 사이를 지나 광장에 들어섰다. 오늘 하루도 실수 없이 무사히……. 암호와 순장패, 성문 열쇠를 전달하는 교대식 우리가 재현하는 교대식은 예(禮)로 시작해 예로 끝난다. 교대식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왕이 내린 암호와 증표를 확인한 뒤 성문의 열쇠를 다음 교대군에게 인계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계별로 들여다보면 이렇다. 우리에게 승정원의 주서(왕명의 출납기관, 관리로 교대의식의 감독관)가 와서 왕의 승낙을 받은 암호를 수문장(수문군의 책임자)에게 전하는 것으로 교대식은 시작된다. 이때를 ‘군호하부’라 한다. 그 다음은 기존 수문장의 참하(수문장을 보좌하는 임무)와 교대군의 참하가 암호를 확인하며 신분확인 절차를 거치는 ‘군호응대’가 이뤄진다. 그 다음은 ‘초엄’이라고 엄고수(교대의식 중 북으로 신호를 보내는 임무)가 여섯 번의 북을 울리면 참하끼리 성문의 약시함(성문의 열쇠함)을 인계한다. 이때 승정원의 주서는 정확히 인계되었는지 감독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중엄’이라고 세 번의 북소리와 함께 양쪽의 수문장끼리 교대 명령의 진위를 확인하고, 마패와 비슷한 순장패를 인수인계해 준다. 마지막으로 ‘삼엄’이라고 해서 두 번의 북소리와 함께 양쪽의 수문군들이 정렬해 군례를 행하면 한쪽은 업무를 마치고 한쪽은 시작된다. 업무가 시작된 수문군은 궁궐의 외곽을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행렬을 돈다. 이것이 우리가 재현하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의 순서다. 우리의 절차 하나하나는 사회자가 우리말로 전하고 이어 일본어, 중국어로 통역을 한다. 그 해설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교대식에서 관람객의 반응은 여러 가지다. 가끔은 우릴 만지거나 들고 있는 깃대를 만져보려 한다. 또 진행되는 도중 길을 막고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다. 이럴 땐 좀 난감하지만 곧바로 근처에 있던 팀장이 바로 지적을 해준다. 그래도 그 나라 언어로 최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 관광객을 만났을 때는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절차에 따라 교대의식을 마치면 관광객들을 위해 사진 찍는 시간을 갖는다. 관광객들은 광장 앞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줄을 선다. 이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에게 답례로 보일듯 말듯 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렇다고 활짝 웃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수문장은 근엄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혹 너무 근엄하면 딱딱하다고, 활짝 웃으면 가볍다, 라는 후기가 인터넷에 올라온다. 가장 난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덕수궁 대한문 앞 오전 11시 교대식을 마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종각까지 행진한다. 사회자는 먼저 전철로 종각까지 이동한 뒤 우리를 기다린다. 그것도 한복을 입고서 계단을 오르내린다. 둘이 이동할 때는 괜찮은데 혼자 갈 때는 사람들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뒷 얘기에 같이 웃는다. 맡은 역할에 충실하며 미래를 향해 걷는다 우린 각자의 역할을 즐긴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매력과 관광객들에게 작은 기쁨과 추억을 만들어준다는 자부심. 계획하지 않고 왔다가 우리를 보고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내거나 핸드폰에 담는 시민들의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 무서워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아이들도 있었고, 일본 아줌마들의 높은 목소리 찬사에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던 적도 있었다. 그들이 간직한 수 만장의 사진 속에는 우리들의 시간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삶의 일부인 오늘, 그 중 짧은 40분의 시간이 각인되었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교대식이 끝났다. 다시 현재다. 우린 2-30대의 젊은이로 돌아온다. 옷을 갈아 입고 수염을 뗀 모습에선 근엄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앳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거나,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고, 식사를 한다. 우리가 쉬는 사이 입었던 의관에 꼼꼼하게 손바느질로 수선해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지금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시험을 준비하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이 일을 천직으로 아는 사람들이 모였다.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며 인연이 되어 제대 후에도 일하고 야간대까지 다니는 최승일, 중국에서 어머니와 귀화한 박세광, 무술을 연마하다 교대식을 알게 된 이우, 중국어 통역사 신혜정, 분장사 최윤희 등. 모두 나의 동료들이다. 같은 공간에서 저마다의 꿈을 꾸며 지금의 일을 즐긴다. 마지막으로 작은 바람이 있다면 대한문 앞 광장이 넓어져 서울광장과 연결된다면? 그래서 웅장한 모습으로 재현하고 관광객들이 넓은 공간에서 즐기길 기대하는 것이다. 자, 이제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는 우리의 이야기는 끝났다. 우린 내일도 관광객의 시선을 즐기며 어깨에 힘을 주고 걸을 것이다.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폼생폼사 아니겠는가. 다 같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인 의식을 마친다는 의미의 예필(禮畢)이라는 구령을 외쳐보자. 배에 힘을 주고 예~필! 시민기자/장경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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