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전설 깃든 광흥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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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0.22. 00:00
시민기자 이종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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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오르는 길목은 생태학습장 그리고 약수터가 있어 시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며 안내판과 등산로가 잘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문화재 231호로 지정된 공민왕의 사당이 있다. 지난 21일 이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주민의 안녕과 산업의 융성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례의식이 경건하고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제례순서는 전폐례(신주 앞에 폐백을 드림), 천조례(제물을 바침), 초한례(첫잔을 올리는 의식), 아헌례(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 종헌례(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의식), 음복례(제사에 쓴 음식을 먹는 예), 송신례(신을 보내드리는 예절), 그리고 망료례(축문이 모두 탈때까지 지켜보고 땅에 묻는 예) 순으로 진행되었다. 공민왕이 어떤 왕이던가. 1330년부터 1374년까지 제왕의 자리를 지냈던 그는 자주정신이 투철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원나라를 반대하여 물리치는 운동을 통해 임금의 재위 연호에 붙이는 칭호와 그 관할 하에 통제함을 모두 없이 하였다. 쌍성통관부를 쳐서 빼앗긴 민족의 땅을 다시 찾고, 변발, 호복 등을 폐지하고,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관제를 복구하고, 전민평정도감과 사병폐지를 감행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비는 원나라에서 온 노국대장공주였다는 사실이다. 공민왕은 혁신가였다. 귀족이 둘을 하나로 합친 토지를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체제나 사회제도를 새롭게 고치는 정치를 하였다. 그러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글씨도 능하였고 특히 ‘대자’에 뛰어났다. 그는 감수성도 뛰어난 왕이었던가보다.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하여 불사에 전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공민왕은 재위 시 지금의 한강을 벗삼아 시화를 즐겼다고 한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지금의 서강 지역에 관리의 녹봉을 보관하는 광흥창을 짓게 되었는데, 그 시절 서강동에 사는 한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홀연히 나타나 "여기는 나의 순수한 기운이 서린 곳이니 사당을 짓고,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 그리하면 잘 되어 성하게 되느니라"고 하였다 한다. 그렇게 해서 이곳에 공민왕의 사당을 짓기에 이른 것이다. 제례를 소홀히 하면 천재지이(天災地異)로 말미암아 불행과 변고가 따르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그동안은 음력 10월 초하루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2004년부터 양력 10월 21일에 모시기로 하였다. 사당 안에는 공민왕, 노국대장공주, 최영 장군, 그리고 그의 옹주와 왕자의 영정 및 자화상이 그려 모셔져 있다. 이번 사당제에는 집례관 집사들 중 고려 태조 왕건의 30대 후손 분들도 참석하였다. 특히 서강동 새마을 부녀회장 강금옥 씨를 비롯한 18명의 회원들은 다섯 가지 음식을 300여 분들께서 잡수시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계셨다. 기자가 본 사당제는 머리가 숙연해질 정도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며 가꾸는 값진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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