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외상장부에서 술친구 찾아볼까?

admin

발행일 2009.07.29. 00:00

수정일 2009.07.29. 00:00

조회 3,570

광화문의 명소 '사직골 대머리집', 30년 만에 다시 찾아오다

메뉴라고 해 봐야 막걸리와 소주에 생선찌개와 묵무침 그리고 투박하게 자른 두부구이 정도가 전부였지만, 1960ㆍ70년대 주당들이 즐겨 찾던 광화문의 명소 '사직골 대머리집'의 영업비결이 30년 만에 공개됐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인심 좋은 주인이 마련한 두툼한 외상장부가 바로 그것. 끝까지 돈을 갚지 않아 떼이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외상인심을 베풀었던 주인장 덕에 이곳은 최불암, 변희봉, 진념 전 부총리 등 방송인, 관료는 물론 광화문 일대 공무원, 문인, 기자, 교수 등의 사랑방이자 정보교환소 역할을 했다.

정식 옥호는 '명월옥'. 김영덕씨가 50년, 그의 사위 이종근씨가 20년쯤 맡아 경영했다. 그러나, 원래 이름보다는 '대머리집'이라 익히 불리웠으니, 입담 좋은 주당들이 '명월'이 주는 연상작용에다 두 사장의 머리숱이 성긴 데서 붙인 애칭이란다.

외상장부를 찬찬히 들여다보자니, 단골손님에 만만치 않은 주인장의 센스도 엿보인다. '필운동 건달' '대합 좋아하는 人' 같은 단골손님들의 특징을 기록한 모습이 그것인데, 읽는 이로 하여금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번지게 한다. 또한, 이미 외상을 달아놓은 손님이나 뚜렷한 벌이가 없는 과객에겐 외상술을 허락하고, '할부 변제'마저 기록되어 있는 곳은 당시의 따뜻한 신뢰와 주인장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소속기관과 인명부터 차례차례 분류해서 빼곡히 적어놓은 것을 보면, 얼마나 단골손님이 많았을까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귀한 외상장부는 당시 단골이던 극작가 조성현씨가 마지막 사장인 이씨로부터 건네받아 보관해왔으며, 7월 3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할 '광화문 年歌(연가) : 시계를 되돌리다'전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 외상장부를 토대로 당시 광화문 뒷골목 풍경과 '사직골 대머리집'을 재현하고, 영상물을 제작하여 당시 넉넉한 인심과 무한한 신뢰가 배어있는 '외상술문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대머리집'은 방 2개와 마당에 술상을 볼 수 있어 손님 50명이 빼곡히 찰 수 있는 한옥 구조였다가 이후 콘크리트로 개조됐다고 한다. 1910년 이전부터, 70년 넘게 대를 이어오며 광화문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오다 1978년 인수자를 찾지 못해 문을 닫았다.

'광화문 年歌(연가) : 시계를 되돌리다' 전시회, 30일 개막해서 9월 20일까지

30년이란 세월이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여러모로 변모했다. IT시대라는 명칭에 걸맞게 일하는 방식도, 사람들의 취미와 특기도 디지털화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몸이 느끼는 것도 그만큼 다양하고 편해졌다. 하지만, 단 하루만 연체되어도 이자가 붙고, 전화공세에 시달려야 하는 각박한 신용카드 사회를 사는 오늘, 그저 주인과 손님의 보이지 않는 신뢰와 외상장부 하나로 신용사회를 만들어갔던 '대머리집'의 아날로그가 그리워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직골 대머리집'은 TV, 인터넷이 없던 시절 광화문 뒷골목 술집들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문화의 사랑방이었다. 몽마르뜨의 카페에서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가 탄생하고,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사르트르, 보브와르와 같은 실존주의 생겨났듯이 문화인, 언론인, 학자, 관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장소였다. 그 점을 떠올리니, '열린 공간'이란 긍정적인 면모를 '익명'이란 부정적인 색으로 칠한 채, 개개인의 고유한 아이디어와 창조적인 개성보다도 비방과 험담이 난무하는 디지털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또 한 번 고개를 든다.

조선시대 이후 600여 년간 수도 역할을 한 서울의 중심지인 광화문 일대에서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들과 그 속에 녹아든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세월이 변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튼튼한 신뢰와 구수한 정만은 사라지지 않았음 하는 바람. 9월 20일까지 전시되는 그 옛날 광화문을 찾아가 우리 내들의 훈훈한 아날로그의 삶에 다시 한 번 젖어보는 건 어떨까?

문의 :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 ☎ 02)724-0153

하이서울뉴스/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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