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 담은 한글 영비(靈碑)를 찾아

admin

발행일 2008.02.22. 00:00

수정일 2008.02.22. 00:00

조회 2,099



시민기자 이혁진

요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문화재나 보물로 지정되면 지자체 입장에서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는 문화재에 깃든 역사성이 어느 아이콘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보물지정을 알리는 현수막을 따라 노원구의 한글 고비(古碑)를 찾았다. 세간에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한글 고비는 우리나라 최초(중종 31년 1536년)의 한글비석이다. 한글전용의 비석은 아니다. 한문비석에 한글을 새겨 넣은 국한문 혼용의 비석인 셈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였던 한글 고비가 지난해 드디어 보물이 됐다는 소식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 본 비석은 생각했던 규모보다는 작았다. 하지만 그것도 창살을 둘러친 신도비 형태로 영비각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대신 비슷한 크기의 복제판 한글 고비가 마치 주인인 양 무덤 앞을 우뚝 지키고 있다.

초라할 듯한 한글 고비가 ‘보물’로 주목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묘비에 한자를 쓰는 풍토는 여전하다. 물론 세태가 바뀌어 한글로 묘비를 세우는 집안도 많아졌지만 아직도 전통에 따라 한문을 쓴 묘비가 많은 게 사실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한글 고비의 탄생은 그 시대상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한글 고비를 직접 쓰고 새긴 사람은 조선 중종 때 승정원 승지를 한 묵재 이문건이다.

그는 부모(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 묘소를 조성하면서 비석에 한글을 새겼다. 한글을 창제한 대왕 세종마저도 왕릉에 한글 비석을 쓰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문건의 혜안은 실로 날카롭다. 특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전함으로써 묘비의 손상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는 한글의 대중화를 예견한 선비로서 한글 묘비는 파격적인 행보였을 것이다. 아마 한글 묘비 때문에 당시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감수했으리라.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전통을 숭상하는 유교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결국 이윤탁의 묘비가 그 오랜 풍상에도 오늘날까지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한 것은 순전히 한글의 영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불암산 자락을 바라보는 한글 고비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금 있는 자리는 앞을 가로지르는 6차선 도로 때문에 뒤로 물러서 있는 상태이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오르면 태릉에 있던 이윤탁의 묘는 왕릉이라는 이유로 이곳으로 쫓기다시피 이장됐다.

이 묘비의 가치는 ‘최초의 한글 묘비’라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특히 시사하는 것은 자식의 효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즈음 자식들의 부모공경이 퇴색하고 물질적인 베풂으로만 효를 치부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효심의 주인공 이문건은 정작 부모님 묘소 근처에 없다. 본인은 안타깝게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주 이씨 후손들이 묘비를 관리하고 있다.

이 비는 1974년부터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ㆍ관리됐으나 지난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글 묘비의 가치를 들어 ‘이윤탁 한글 영비’로 새로 고치고 국가문화재인 보물(제1524호)로 지정됐다.

한글 영비 오른쪽 면에 있는 한문과 왼쪽 면에 있는 한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오른쪽 면 : 靈碑, 爲父母立此誰父母何忍毁 不忍碣 犯則墓不忍凌明矣 萬世之下可知免夫. (영비,위부모입차수부모하인훼 불인갈 범칙묘불인능명의 만세지하가지면부)
▶ 왼쪽 면 : "신령한 비이므로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찾아가는 길] 한글 영비는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산 12-2에 있으며,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4번 출구)에서 1221번 버스 또는 4호선 노원역(1번 출구)에서 1142번 버스, 지하철 7호선 하계역(3번 출구)에서 1141번 버스로 각각 환승해 대림벽산아파트 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내려서 도보 5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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