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주박과 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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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7.03.21. 00:00

수정일 2007.03.21. 00:00

조회 1,500



시민기자 이혁진

성큼 다가온 봄기운에 마음은 급하다. 운동도 새로 시작해야 하고 손짓하는 화신(花信)에 꽃마중도 가야겠고, 주체할 수 없는 심사가 꿈틀거린 지 벌써 오래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부터 추슬러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주말을 맞아 대청소를 핑계로 식구들을 동원해 각자 바쁜 와중에 난 바가지와 표주박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지난해 가을 시골에서 구한 박들을 관상용으로 내내 두고 보다가 흥부가 박을 타듯 깨보고 싶었다. 밭에서 갓 따온 박은 푸른색을 띠어 마치 큰 옥구슬같이 아름다웠다. 언뜻 투박해 보여도 박은 시골의 푸근하면서도 넉넉한 인심을 보여준다. 습기만 타지 않으면 곁에 두고 자연 상태의 박을 오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박속의 수분이 외부 온도차를 이기지 못하면서 박을 온전하게 두질 않는다. 계란이 곯아 썩듯이 뭉그러지고 만다. 이런 홍역을 치르며 아까운 박을 몇 개나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운 좋게 잘 생긴 박이 하나 남아 바가지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먼저 실톱으로 박을 갈랐다. 자르는 게 쉽다고 무턱대고 힘을 가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박이 그야말로 속이 꽉 차서 날카로운 실톱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힘들게 자르고 나서도 문제였다. 박속의 씨와 내용물을 긁어내는 데만 무려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희끄무레한 과육과 과육 틈 속에 자리한 씨들이 박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박속이 텅 비어 있을 것이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다음은 박을 찌는 과정이다. 들통 속에 박을 넣고 빨래 삶듯 30분을 삶았다. 잘 익어 때깔 좋은 노란 바가지 모습이 보였다. 건져서 바람 부는 음지에서 온종일 말리니 태깔이 더 고아졌다. 듬직한 바가지는 보기만 해도 손길을 유혹한다.

내친김에 표주박도 만들었다. 서울시에서 나눠준 조롱박을 바가지 만드는 요령으로 자르고 말려서 길다란 호리병 같은 표주박이 탄생했다. 영락없이 절간 약수터에 걸쳐놓은 앙증맞은 표주박이다.

요새는 표주박도 기계가 다 알아서 만들어준다고 하니 왠지 가볍게만 보인다. 직접 표주박과 바가지를 다듬고 만드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만들고 보니 뿌듯하다. 표주박이 걸려 있는 주방을 생각하니 포근하다. 바가지 한 두 개가 겨우내 익숙했던 집안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꾸는 묘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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