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야학은 누군가의 꿈을 이뤄주고 있다

시민기자 이은자

발행일 2010.09.14. 00:00

수정일 2010.09.14. 00:00

조회 3,617


폭염과 장맛비로 여름 나기가 쉽지 않았던 지난 8월, 또 하나의 소식으로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워졌다. 10년 가까이 한 지역에 살면서, 얼마나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살아왔는지를 반성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직도 가까운 주변에서 야학의 소리가 들리다니! 망설이지 않고 구로시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구로지역의 유일한 야학 ‘섬돌야학’을 찾았다. 5평 규모의 방 두 개를 강의실로 쓰고 있는 오밀조밀한 섬돌야학의 여러 가지 비품들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며 강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강의실에는 젊은 여교사와 주부학생 둘뿐이었지만 열기로 가득했다. 어려운 과학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데, 과연 50대 중반의 주부가 이해를 하고 있을지 갸우뚱해졌다. 양해를 구

하고 조용히 청강을 하다가, 결국 수업방해를 하고 말았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아서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신상 밝히는 것도 사진촬영도 거부하여, 아스라이 잊고 살았던 청소년 시절과 섬마을 선생님 시절의 짧은 야학경험을 털어놓았더니,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낡은 형광등 불빛 아래 이야기꽃을 피우노라니,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던 70년대 초반의 반상회가 열리던 그 동네 사랑방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은자 기자: 60~70년대 당시 초등학교만 마치고 중학 진학도 포기해야 하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참 많았었다. 대학만 합격하면 그 아이들에게 최소한 신문 한 장이라도 읽을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다. 드디어 사범대학을 합격하고, 첫 번째 했던 일이 바로 20여 명의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자정이 지나도록 야학을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1년 가까이 진행됐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와 후배들이 회사나 공장에 취직을 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 가기도 하여 참 보람 있었다. 섬으로 초임발령을 받아갔을 때도 가자마자 야학을 시작했다. 영어, 한문을 중심으로 전 과목에 걸쳐 매일 저녁 3시간씩 야학을 했다. 1시간 30분 넘게 경운기를 타고 손전등을 켜고 달려온 아이들, 떡시루를 경운기에 싣고 와 두 손을 꼬옥 쥐고 놓을 줄 몰랐던 주민들, 어촌의 뼈아픈 삶을 생각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푸른 바다……. 잊을 수가 없다.

주부학생 : 우리 선생님도 정말 열심히 잘 가르쳐준다. 선생님 덕분에 과학을 만점 맞았다. 지난 4월에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이젠 대입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다. 독산동에 살고 있는데 거기는 야학하는 곳이 없어서, 사이월드에 들어가 집에서 가까운 구로구 야학을 찾아왔는데 얼마나 잘 왔는지 모른다. 우리 선생님은 미국유학을 하고 온 실력 있는 선생님이다. 열심히 해서 사회복지학과에 꼭 합격해서 나도 봉사를 하고 싶다.

강윤진 교사 : 아니다. 아주머니가 열심히 해서 합격하신 것이다. 주부이지만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어려운 문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해결한다. 오히려 우리 교사들이 본받을 점이 많고, 그 열정에 감탄한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강윤진(24) 교사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대학원 준비를 하고 있다. 집 부근 복지관에서 방과후 봉사를 해오다가, 전국야학협회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곳을 찾아 스스로 자원봉사를 자청한 교사다. 교통도 매우 불편한 곳인데 정말 대단하다. 50대 중반의 주부학생이 과학을 만점 맞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13세 때 세상을 떠나셨기에 몸이 불편한 오빠와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던 주부(47)다. ‘초등 중퇴’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녀 2006년 7월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립학원 문을 두드렸지만 월 50만원에서 100만원을 넘나드는 학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서비스업 종사자인 그녀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터로 나가 꼬박 12시간을 일하고도 퇴근하면 버스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곳으로 바로 달려오곤 한다.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고 감사하다면서.

21세기의 우리의 교육환경은 어떤가? 교육의 질은 놔두고라도 외형적인 면에서는 농어촌, 도시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학생이 대안학교를 찾아 산간이나 시골학교를 찾아가기도 한다. 문맹의 문제도 구민회관이나 주민자치센터, 복지기관 같은 데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충족시켜주지 않는가! 그런데 여전히 야학이 누군가의 꿈을 이뤄주고 있는 것이다. 섬돌야학의 대표교사 이선권(35) 씨를 만나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은자 기자: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이 야학에서 봉사하게 됐는가?

이선권 교사 : 2005년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한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 입사하면서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배우지 못한 설움과 한을 갖고 있는, 소외된 이들을 방치한 사회구조에 늘 관심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실 어려운 이들에게 조그마한 배움의 불씨가 되었던 ‘야학’이란 존재가 이제는 경제발전의 그늘에 가려 추억 속으로 빛 바래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야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교사들이 있다. 우리 야학의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을 막 졸업한 졸업생과 재학생 자원봉사자들로 14명이다. 학생들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지만 규칙적으로 참석하는 이들은 주로 40대 주부들이며 13명이다. 수업은 2개의 중고등부 검정고시 대비반을 월~금요일까지 매일 3시간씩 전액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운영비는 올해부터 구청의 지원금이 끊긴 상태여서 교사들 회비, 약간의 후원금 등으로 어렵게 충당하고 있다.

이은자 : 지원금이 끊겼다니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이선권 : 1991년부터 정부와 서울시로부터 각 500만원 씩 받았던 지원금이 올해부터 정부의 예산삭감으로 자취를 감췄다. 다행히 서울시에서는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여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고 있지만 언제 집행될지는 모른다. 이런 상황은 2006년부터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이 부서를 담당하면서부터 그 이듬해인 2007년, 청소년이 80% 이상인 곳에 한해 지원하기로 대상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위한 지원기금이 목적 외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대신 성인이 많은 야학들은 교육인적자원부의 ‘문해교육’ 지원을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문해교육 지원은 각종 민간복지관과 지자체가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야학이 낄 틈이 없다. 서울 시내에서 21개 구청이 올해로 5년차에 접어드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문해교육 지원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데 구로구는 참여하지 않고 있어 막막할 뿐이다.

이은자 : 이런 상황이라면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데, 최소한의 지출현황과 단기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져 있는지 알고 싶다.

이선권 : 봉사하는 교사가 미취업자나 학생도 많아서 매월 47만원의 월세도 사실상 해결하기 어렵다. 현재는 야학설립 이후부터 일일주점, 후원금 등을 통해 꾸준히 저축해 놓았던 비용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지 답답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명분으로 운영하고 있는 섬돌야학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존폐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모순된 현실이다.

이은자 : 벽에 걸린 ‘더불어 한길’이라는 액자가 눈에 띄던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이선권 : 야학 초창기에 신영복 교수가 선물해준 친필 글씨다. 섬돌야학의 모토다.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이 야학을 지켜온 수백 명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대개 야학이라 하면, 이념적인 것을 개입시켜서 불온하게 보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심훈의 '상록수' 같은 소설 속 인물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요, 더 많이 배우고 갖춘 사람의 낭만 같은 봉사도 아니었다. 어려운 여건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잃은 이웃들에게 ‘신문 한 장이라도 보게 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과 사랑’이 전부였다. 그들에게 베푸는 것은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혜택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함께 나눠야 할 의무인 것이다.

과거 공단이 많았고, 다른 지역보다 훨씬 열악했던 구로지역이 오늘날의 발전을 가져온 밑거름이 되었던 야학은 구로의 교육과 문화의 거룩한 상징이 될 수 있다.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 장애가 있어서 균등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다문화가정 등 1:1 교육이나 멘토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배우고자 손을 내민다면 따지지 말고 붙잡아줘야 한다. 회비까지 내가며 무료봉사를 하고 있는 20~30대의 이선권, 차선영, 김지석, 조용준, 김현곤, 이상호, 김현철, 임명환, 김도형, 김선주, 장다인, 김재원, 전태옥, 강윤진 선생님들의 훌륭한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부디 정체불명의, 온갖 교육의 봇물로 넘실대는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선 등대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구로구 #야학 #검정고시 #주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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