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충전, 서울 효도 관광

admin

발행일 2009.09.24. 00:00

수정일 2009.09.24. 00:00

조회 3,153

한강유람선에서 상암 디지털 파빌리온까지, 하루 꼬박 동행 취재기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하는 가족들은 정말 대단하다. 경제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부모님과 나들이 시간이라도 가진다면 말이다. 격조하고 소원한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데 가족여행만큼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러나 정작 이런 가족이 얼마나 될까? 기자 본인부터도 홀로 계신 아버님께 여행을 제안하기는 커녕, 안부전화도 제대로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설령 휴가라도 얻을라치면 나하나 편한 것부터 급급해 부모님 챙겨 바람이라도 쐬어드리는 것은 진작 접어둔 것 같다.

지난 17일,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이 선발한 홀몸노인 40명(남자 12명, 여자 28명)의 서울나들이에 동행했다. 어르신들은 65세 이상으로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혼자 사시는 노인들이다. 아침 9시 30분에 집결, 한강유람선을 타기 위해 여의도 선착장으로 출발했다. 버스에는 복지관 직원과 노인돌보미 자원봉사요원들도 함께 했다. 그런데 버스 안은 침묵이 흐른다. 서로가 서먹한 탓도 있지만 어딘가 잠시 외로운 삶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어르신들의 질펀한 관광버스 분위기를 보리라는 기자의 기대는 너무 성급했음이 드러났다.

예상보다 빨리 선착장에 도착, 유람선을 승선하기까지는 점심식사를 포함하여 여유롭게 한강변을 즐길 수 있었다. 삼삼오오 끼리끼리 자연스럽게 말벗들을 사귀며 점차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마치고 쉬고 계시는 몇몇 어르신들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박준문(73) 어르신은 "자식도 본체만체하는 세상에 이렇게 관광까지 시켜줘 너무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복지관에서 컴퓨터와 스포츠댄스를 배워 나이 들어도 자신감을 얻었다. 또 시간 날 때마다 종묘 시국강연에도 간다”는 그는 "혼자 사는 노인들을 돌보고 챙겨주는 정부와 시(市)가 너무 잘하고 있다"며 덕담을 건넸다. 그는 2년 전 당뇨가 발병하기까지 일을 계속했으나, 지금은 비가 오지 않는 한 매일 8천보를 걸으며 건강을 다지고 있다고 했다. 자기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어르신은 나이에 비해 4,5세는 젊어보였다.

자리를 옮겨 최고령자라 소개받은 현원섭(83) 할머니를 만났다. "얼굴이 곱게 보이시는데요." 기자의 인사말에 쑥스러워 하시는 것도 잠시. 그는 "20년간 배드민턴을 한 덕분이지요. 나이 먹어도 찍어 발라야 한다"며 나름의 건강론을 펼쳤다. 관절 때문에 4년 전부터 배드민턴을 그만 두고 지금은 경희대에서 매일 아침 걷기 운동을 하는 그는 돈보다는 인생이 짧은 게 걱정이라며 “마지막엔 곱게 갔으면 좋겠다"고 낙천적인 여유를 보였다. 그는 3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5남매 자식들이 있지만 혼자 살고 있다.

오후 1시에 본격적인 한강유람선 투어가 시작됐다. 여의도선착장을 출발해 원효대교, 마포대교, 서강대교, 양화대교 선착장을 돌아오는 코스다. 배 안은 평일이라 한가해 어르신들 전세 유람선이나 다름 없었다. 조용히 선창 한강 풍경을 감상하기엔 그만이었다. 아직도 말벗을 찾지 못한 어르신 중 몇 분은 흐르는 강물에 덧없는 과거를 비춰보는 것만 같았다. 쓸쓸함 때문이랄까. 그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런 ‘센티멘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김옥경(76) 할머니는 "혼자 사는 여자보다 남자가 더 외롭다"며 친구 설계연 할머니와의 우정을 과시하며 뱃전에서 멋있는 포즈를 취했다. 사실 그랬다. 관광도 할아버지보단 할머니들이 한층 세련되게 즐기고 있었다. 양화대교를 경유하며 마침 힘차게 하늘 높이 뿜어대는 월드컵 분수를 보며 탄성을 질러대는 것도 역시 할머니들이다. 그만큼 할아버지들은 감정 표현이 서툴고 느렸다. 서강대교를 지날 때 철새도래지 밤섬을 볼 때도 할아버지들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이다. 하기는 필자도 감정이 거의 무뎌질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왠지 할머니들의 낭만이 부러웠다. 그런데 박준문 할아버지는 어느새 어느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싱글벙글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유람선을 즐기고 있었다.

이광웅(66) 할아버지는 일행 중 젊은 축이지만 그도 20년 전 모아둔 큰돈을 이른바 바지사장으로 있다가 그만 사기를 당해 그때부터 혼자 살고 있다. 그는 복지관에 가고 싶지만 생계 때문에 하루 몇 천원이라도 벌기 위해 파지를 줍고 있다. 또한 그는 "비가 올 때는 가끔 헤어진 가족들이 생각나지만 이제 와서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잊고 지낸다"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다음은 상암동에 있는 디지털 파빌리온으로 이동했다. 디지털 파빌리온은 최첨단 미래세계를 보여주는 IT전시관이다. 어르신들은 안내원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어린이처럼 호기심 어린 눈 그대로였다. 사실 어르신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내심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몸소 체험하려는 욕심 때문에 일정보다 조금 지체됐지만 IT강국의 자부심을 어르신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고 얼굴에 물을 뿜어대는 4D 입체영화관을 볼 때는 소리 지르는 '감수성 높은' 어르신도 있었다. 일주일에 5일 복지관을 출근하다시피 들른다는 천순자(67) 할머니는 "앞서가는 첨단시설을 보게 돼 출세했다"고 말했다. 누군가 탄식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렇게 좋은 세상인데 왜 먼저 갔는지 억울해. 산 사람이라도 건강해야지!"

복지관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유람선 추억과 신기한 IT미래의 꿈을 담은 어르신들의 얼굴은 처음 출발할 때와 달리 행복으로 충전된 모습이었다. 행복 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다. 기자 또한 어르신들이 겪는 고독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귀향 버스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맞춰 부른 김광태 어르신의 구성지고 멋들어진 노래는 오늘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끝으로 무사히 여행을 마친 어르신들에 대해 감사를 전한 복지관 지성근(35) 복지과장은 어르신들의 무운을 빌며 다음 약속을 기약했다.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동행후기

복지관 직원들이 안내하는 대로 기자는 어르신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이번 문화체험은 복지관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해 추진하는 행사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무엇보다 참여한 어르신 대부분이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일부는 경로당에서, 일부는 복지관과 노인돌보미가 관리하는 어르신 중에서 선발됐다. 그래서 여행 중 어색한 분위기는 불가피한 문제였다. 앞으로 이 프로젝트가 더욱 좋은 반응을 얻으려면 이런 점을 보완하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겠다. 참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미리 충분한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서먹한 분위기를 해소하거나 투어 중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어르신들 간의 유대와 동질감을 높이는 테크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화체험은 참여자 간의 친목과 추억을 공유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시민기자/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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