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테일러’ 이야기가 담긴 공간들

시민기자 박세호

발행일 2020.08.10. 19:27

수정일 2020.08.10. 19:27

조회 381

부분 개관한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자출입등록 후 입장하면 된다.
부분 개관한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자출입등록 후 입장하면 된다. Ⓒ박세호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항복과 함께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당장 그 기쁨을 나누지 못한 분들이 있었다.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고마운 외국인들이었는데, 상당수가 이미 추방되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추방된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의 가족도 그 중 하나였다. 앨버트는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 동생 윌리엄 테일러에서부터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와 아들 브루스 테일러까지 3대를 이어 서울에서 살았다.

이미 먼저 들어와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의 요청으로 두 형제가 한국(당시 조선)에 들어온 것이 1910년대였다.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업과 함께 조선호텔 앞에서 무역상을 하였고, 동생 윌리엄 테일러는 한국은행 앞에 가게가 있었는데 시보레 자동차 딜러도 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AP통신이 조선에 상주하던 앨버트에게 특파원 일을 맡겨 기업인 겸 언론인이 되었다. 곧 바로 1919년 고종황제 국장(國葬)으로 시작하여 3.1만세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등이 숨 가쁘게 몰아쳤다. 일제 식민통치로 외부세계와 차단되었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왼쪽부터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 본인 앨버트 테일러, 부인 메리 린네
왼쪽부터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 본인 앨버트 테일러, 부인 메리 린네 Ⓒ박세호


그 공백지대에서 일제의 만행을 지구촌 세계 각국에 알린 앨버트의 역할은 더욱 크게 빛났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스코필드, 언더우드 등 유력 인사들과 함께 총독을 방문해 항의하였다.

앨버트 테일러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경로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돈의문박물관마을 내 '테일러상회'의 간판을 건 테마 하우스다. 돈의문구락부 독립 가옥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그가 살았던 양옥 저택인데, 귀중한 건축유산으로 인정받는 ‘딜쿠샤’다.

100년 전 성업을 이룬 테일러상회 간판이 이채롭다
100년 전 성업을 이룬 테일러상회 간판이 이채롭다. Ⓒ박세호

돈의문박물관마을 '테일러상회 전시관'

먼저 돈의문박물관마을은 근현대 모습을 간직한 건축박물관이자, 기획전시관이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까지 있었던 도시형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이 남아있는 새문안마을을 ‘도시재생’ 방식으로 개조했다. 서울시가 이곳에 있던 기존 가옥 68채 가운데 총43채를 유지·보수했다.

돈의문구락부는 서대문 부근 외국인들이 교류하던 곳으로 낭만이 서려있다
돈의문구락부는 서대문 부근 외국인들이 교류하던 곳으로 낭만이 서려있다. Ⓒ박세호

서울, 당시 경성에서 살던 서구인의 수는 많지 않아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새문안로 인근에서 어울리던 장소를 테마 전시관으로 보여주는 곳이 돈의문박물관마을 내 ‘테일러상회(W.W.Taylor Co.)’다. 돈의문구락부에는 붉은 카펫을 깐 영화세트장과 흡사한 고급스러운 무대와 카페, 그리고 유성기 등 당시의 문화시설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이 마을에 거주했던 외국인들로 구락부를 자주 활용했을 미국인 사업가 W 테일러와 프랑스 상인 부래상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상상이 된다. 무슨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을까 궁금해진다.

카펫을 친 무대와 유성기와 카페가 인상적인 돈의문구락부
카펫을 친 무대와 유성기와 카페가 인상적인 돈의문구락부 Ⓒ박세호

생활사전시관에는 일반 주택 안의 일상용품들이 전시된다
생활사전시관에는 일반 주택 안의 일상용품들이 전시돼 있다. Ⓒ박세호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는 조선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리사의 집과 그의 후원자인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고, 스코필드 기념관도 있다. 새문안영화관, 돈의문역사관, 사진관, 이용원, 서울미래유산관, 시민갤러리, 생활전시관, 컴퓨터 게임장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개조한 집들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고 유한양행과 현대제철 사옥으로 사용됐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도시건축센터’가 지어졌다. 이 곳에선 각종 건축전시물과 함께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회장의 사무실, 자택 및 저서 등 전시를 볼 수 있으며 그의 생애에 접목한 위인전, 감동적인 서적과 자료들도 만날 수 있다.

이 성곽 오른 쪽 언덕 밑으로 가면 은행나무 앞집이‘딜쿠샤’다
이 성곽 오른 쪽 언덕 밑으로 가면 은행나무 앞집이‘딜쿠샤’다. Ⓒ박세호 

서울 종로 행촌동 가옥 ‘딜쿠샤’

두 번째는 사직터널 위 행촌동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앨버트 가옥 ‘딜쿠샤’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이나 딜쿠샤, 각각 종로마을버스 5번 정류장(강북삼성병원 앞, 한국사회과학자료원 앞)으로 지정돼 접근이 편리하다. 도보답사도 가능하다. 시간 여유가 되면 경교장, 독립문, 서재필 동상,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홍난파 가옥, 사직단, 이상의집 등도 간단하게 동선에 넣으면 좋다.

행촌동 언덕 위에 유래를 모르는 오래된 지하1층 지상2층 붉은 벽돌의 서양식 저택이 있었다. 후일 ‘1923 DILKUSHA 시편 127편 1절’이라는 대리석 주춧돌이 발견돼 집 주인의 이름은 앨버트 테일러이며 갓 결혼한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와 함께 아버지의 광산업을 도우려 서울에 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인인 메리 린리 여사가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와 건물에 이름을 부쳤다고 한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희망의 궁전’을 뜻한다. 앨버트는 여기서 외국인 선교사들과 사업가들을 초대해 모임을 갖고 정세를 논의했다.

‘딜쿠샤’ 복원 현장. 등록문화재 687호로 지정됐다.
‘딜쿠샤’ 복원 현장. 등록문화재 687호로 지정됐다. Ⓒ박세호


AP통신 특파원으로서 활약한 앨버트가 겪은 3.1절 취재의 극적인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나 3.1운동이 있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세브란스 병원 침대 위에 있었는데, 간호원들이 인쇄물을 숨기려 동분서주하고 병원에 경찰이 들이닥칠 것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앨버트는 독립선언서를 보았고 그 중 한 장을 감췄다.

앨버트의 부인 메리 여사의 '호박목걸이'에도 3.1절 전일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앨버트의 부인 메리 여사의 '호박목걸이'에도 3.1절 전일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박세호

그는 이 극비 문서를 갓난아기(브루스 테일러)의 침대 밑에 깔았다가, 구두 뒤축에 숨겨 외부로 반출한 후 3.1운동 기사와 함께 동생 윌리엄 테일러를 동경에 보내 미국으로 기사가 전송되게 했다. 만약 들킨다면, 조선인들의 엄청난 거사가 사전 탄로 나는 등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앨버트가 쓴 기사는 통신사 망을 거쳐 세계 최고의 신문인 뉴욕타임스 지면을 장식했다.

이후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특종으로 타전하였다. 법정 재판 취재와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미일간 적대국이 된 이후, 1942년 추방되었다.

광복이 되자 앨버트 테일러는 그 즉시 한국에서 일할 것을 당국자들에게 백방으로 호소했으나 무산되었고, 1948년에 미국에서 작고 하였다. 한국에 묻히겠다는 유언에 따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내 메리 여사가 유골을 들고 들어와 양화진에 모셨다. 동생 윌리엄 테일러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이 된 1945년 들어와 딜쿠샤에서 살다가 집을 팔고 한국을 떠났다.

오는 11월 개관 시 건물과 함께 테일러 일가의 다양한 유품을 볼 수 있다.
오는 11월 개관 시 건물과 함께 테일러 일가의 다양한 유품을 볼 수 있다. Ⓒ박세호

브루스 테일러는 2006년 딸 제니퍼 테일러를 데리고 그리던 한국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 앨버트 테일러가 사랑했던 한국의 모든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했고,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브루스 테일러는 어머니 메리 린리가 출판하려 했으나 펴내지 못한 책 원고를 정리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결과가 ‘호박목걸이’ 단행본이다. 한국에서의 다채로운 추억을 회고하며 펴낸 것이다. 이는 돈의문박물관마을에도 전시중이다. 브루스도 2015년 세상을 떠났다. 앨버트 본인과 부인과 아들, 그리고 아버지 알렉산더까지 3대가 한국에 묻혔다. 2018년엔 제니퍼가 한국에 와 테일러 가문의 유품 1,026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4대까지 이어진 한국과의 인연이다. 

이 건물이 완공되는 오는 11월 중 시민들에게 오픈 된다고 하니 기대가 무척 크다. 제니퍼 테일러가 기증한 테일러 가의 소중한 물품과 유품들도 함께 전시될 것이다. 우리가 힘겹고 어려울 때 인도적 정신을 발휘하여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외국인들의 선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며 이들 이방인들의 지극한 한국사랑 감동 스토리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돈의문박물관마을
○ 위치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7-22
○ 운영시간 : 매일 10:00 ~ 19:00
○ 휴무일 : 매주 월요일
○ 입장료 : 무료
○ 홈페이지 : http://dmvillage.info/
○ 문의 : 02-739-6994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행촌동)
○ 문화유산채널 보기 : https://www.youtube.com/user/korean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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