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손안에서울

발행일 2004.09.09. 00:00

수정일 2004.09.09. 00:00

조회 1,966



시민기자 최중매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대학생들인데 한국어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설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좀 망설였다.
이유는 세 가지, 우선 첫째 이유는 이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본이 한국인을 탄압하기 위해 1908년 당시 5만원으로 지은 감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1894년부터 벌어지는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역사적인 냉정함과 객관성을 가지고 일본 젊은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중이었기 때문이다.
핑계 같은 마지막 이유는 영어권 관람객에게 설명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극복해야 할 과제라 생각하고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8명의 학생을 영상실에 모아놓고 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일본인에 의해 1908년 세워졌다는 것, 이곳은 일본이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한국의 애국독립 열사들을 감금, 고문, 투옥, 사형시키기 위해 세운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역사적인 사실만을 보기로 하자고 운을 떼었다.

원래 보안청사였던 1층, 2층에 각각 전시되어 있는, 을사 5적중의 한 명인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실패해 서대문형무소에서 24세때 사형당한 이재명의사, 일본총독 사이또 마코또에게 폭탄을 던져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암살하려다 37명의 사상자만 낸 채 보름 후 잡혀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65세의 강우규의사, 창덕궁 금호문에서 거사를 일으켰던 송학선의사 등을 소개했고 이어 1894, 1896, 1905. 1907, 1910년 당시 한국과 일본관계를 설명했다.

임시 구금실이자 고문의 현장인 지하로 내려가 고춧가루고문, 물고문, 비행기고문, 전기고문, 손톱바늘고문, 성고문등을 보여주면서 특히 당시 일본은 재정러시아가 폴란드를 탄압할 때 썼던 72가지 고문방법들을 그대로 썼었다는 보충 설명을 잊지 않았다.

이어 T자형으로 지어진 9, 10, 11, 12호 감옥과 공작사로 군수용품을 생산해냈던 형무소내 공장인 13호, 나병사, 기념비, 사형장, 문과 유관순열사가 감옥에서 동료 이신애와 함께 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만세를 외치다 고문으로 죽어갔던 여성 지하감옥을 보았다. 높이 1미터를 채 넘지 않는 감옥이었다.

마지막으로 감시탑이었던 6개의 망루중 현존하는 2개의 망루를 바라보며 서대문 형무소역사관을 본 소감을 물어보았다. 관람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고백이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누르고 인권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일본인, 한국인이라고 구분하기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들과 나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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