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없는 날은 뭔가 간지럽다. 하루에
만 보를 걸어야 장수한다는 TV뉴스를 뒤로 하고라도 걷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산에
오르는 것은 작정을 해야 하는 이유도 있고, 등산화도 변변히 마련치 못해 어려운 나에게,
산책의 배경은 늘 서울의 도심이 그 주인공이 되곤 한다. 사람 사는 모습도 보고, 봄이 골목에
스며드는 색깔도 구경하고, 동네 아이들과 할머니들과 혹은 바쁜 아저씨들과 일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걷다 보면, 보통 동의 경계를 넘을 때가 많다.
그런 날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내가 찾아간 곳은 서울의 오래된 골목 동네 창신동이었다.
며칠 전 아는 친구가 이리로 이사했을 때 잠시지만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골목 빼곡히 들어
앉은 상가와 분위기가 그 옛날 서울의 오래 된 골목길의 형태가 남아있어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기도
했다.
꿈처럼 몽롱하게 오후의 빛이 무르익은 날. 난 서울 한복판 사대문 언저리인 창신동 등산길(?)에
올랐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동네는 절집 원각사를 비롯해 엄청나게 큰 바위에 새겨진
자지동천, 지봉 이수광 선생의 비우당 옛터 등이 자리잡고 있는 역사적인 터였다는 것이였다.
특히나 그 옛날 비운의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동망봉의 자주동샘이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측은하게 했다는데, 그 사실을 알리 없는
나는 그저 언덕배기 동네 슈퍼마켓에서 시원한 음료수만 찾고 있었으니...
사실 이러한 유적지를 빼고라도 창신동은 참 특이한 감정을 내게 주었다. 그것은 만화가 길창덕
님의 명작 신판보물섬의 초기 무대가 되는 서울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란 이야긴데, 얕은
골목 사이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 음식점.정육점.철물점.과일가게. 수시로 지나가며 인사하는
동네 사람들.아이들.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골목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이래서
서울이랬나. 아마 강남의 너른 땅 위에서 칼로 자를 대고 도로를 만든 곳에서 다닌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알리 없을지도 모른다.
빼곡한 느낌. 콩나물 시루같은 골목사이로 웃음이 화사하게 퍼지는 인사들. 미소들. 창신동은
그렇게 만화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창신동의 골목을 한참 올라 다다른 곳은 동망봉이란
산동네였다. 왜 동망봉일까. 하고 궁금해 했지만.딱히 물어 볼 때도 없구해서 참았는데, 알고
보니 단종비가 애통한 가슴을 안고 날이면 날마다 올라와서 단종이 가신 영월 쪽을 바라보아
생겨난 명칭이란다. 아,동망봉이라. 그리고는 숭인동쪽으로 넘어가 서울의 시내를 탁 트이게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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