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만나는역사 ‘풍납동 백제 우물터’
발행일 2018.01.08. 08:05

풍납동 토성 동성벽 밖으로 아파트 주변에 세워진 백제 우물터를 만날 수 있다
서울은 집마다 수도를 틀면 깨끗한 아리수가 나오고, 외출했을 때 목이 마르면 생수를 사 먹는 간편한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으라고 한다면 어떨까? 깊숙한 산골이라면 모를까 대도시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기자는 ‘삼국시대에는 어떻게 물을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백제 우물터를 찾았다.
풍납동 토성 동성벽 주변으로 조성된 아파트와 주택가 도로를 걷다 보면 한 편에 세워진 백제 우물터를 만날 수 있다. 한 여인이 바가지를 들고 우물에서 물을 긷는 모습인 조형물은, 우리 옛 전통 우물을 연상시켜 어쩐지 낯설지 않다.
이 우물은 2004년 아파트공사 당시 발굴된 ‘한성기 우물’을 재현한 조형물로 원지반을 자갈층까지 깊게 파고 난 후 목재의 양 끝을 다듬고 이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층층이 쌓아 올려 만들었다. 위에서 보았을 때 井(우물 정)자 모양이고, 한 변 1.2m인 정사각형으로 실제 높이는 2.5m이다.
이곳을 종종 지나다녔지만 이렇게 관심 있게 들여다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 것 같다. 우물 내부에서는 당시 백제인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한 토기류, 목제 두레박, 새끼줄 등 유물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우물을 보며 ‘2.5m 높이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면 얼마나 불편했을까?’, ‘번성한 왕조의 삶에 비교해 백성들의 삶은 그만큼 척박했던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 여인이 바가지를 들고서 우물에 서 있는 모습은 이곳에 우물터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우물터 앞 표지석에는 ‘우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문화재란 사람과 함께 공존할 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숱한 왕조의 흥망성쇠와 끊임없는 역사 격랑 속에서 아름다운 옛 풍광은 잃었으나, 풍납토성 언저리인 내부와 외부에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발자취가 소중하게 담겨있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1호 풍납동 토성은 백제 한성기 중요한 유적이다. 한강 남쪽에 있는 초기 백제 시대 성곽으로, 1925년 대홍수 때 중국 제청 동자루 솥을 비롯한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 토성 성격에 대한 왕성이라는 견해와 단지 방어성일 뿐이라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왔다. 그러다 1997년부터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왕궁터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후 토성은 백제 시조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처음 도읍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에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 올린 판축 토성으로, 규모는 너비 43m, 높이 11m다. 옛날 토성 둘레는 3.5km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2.1km 정도 남아 있다.

1,500여 년 전 한성 백제 시대 옛 왕도와 왕조를 떠올리며 걷자, 풍납동 토성의 둔덕 아래 산책길이 새롭게 느껴진다
이날은 눈이 내려 풍납동 토성 둔덕 아래에까지 고즈넉이 눈이 내려앉았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여름에는 신록으로 물들고, 가을에는 단풍이 여물고, 겨울에는 소복소복 눈이 덮이는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성이다.
도심 속 구릉이 아닌 평지에 성을 쌓은 이곳 산책길을 걸으며 옛 왕도의 왕족과 주몽 아내이자 고구려 유리왕 어머니였던 소서노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 서울 풍납동 토성 안내 ○ 위치 :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72-1 ○ 문의 : 02-2147-2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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