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람] “한 색소폰 연주자의 회고”

시민기자 휴먼스오브서울

발행일 2017.07.17. 16:09

수정일 2017.07.17. 16:25

조회 908

“제가 만18세 때 색소폰 연주자로 처음 무대에 올랐어요.
‘낭랑쇼’라고, 그 후로 뭐 ‘하춘화쇼’, ‘이미자쇼’ 이런 지방 순회를 많이 했죠.
그 당시엔 색소폰 연주자가 귀할 때였거든요. 그 이후로 그렇게 연주를 한 사십여 년 했어요.”

인터뷰어

“그러다 이렇게 기초생활수급자 생활을 한지는 이제 한 9년 됐어요.
바에서 손님 기분 맞추려고 못 먹는 술을 억지로 먹었더니 심근경색이 왔거든요.
한 3,000만 원짜리 집 얻어 살고 있었는데, 다 팔아서 2,000만 원 수술비 대고, 600만 원짜리 악기도 팔고. 갑자기 심장병만 안 걸렸어도 한 70살까지는 일할 수 있었는데…”

인터뷰어

“가장 후회되는 일은 뭔가요?”

“내가 다른 거 후회하는 건 없는데, 우리 딸래미를 입양 보낸 게 제일 후회되지.”

“왜 보내게 되셨어요?”

“그게… 애기 엄마가 스물여섯 살 때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 때 나는 서른 살이었고,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했거든요.
애기 엄마 죽고 한 일 년을 혼자 아이를 키웠는데, 내가 카바레에서 음악하고 지방을 돌아다니고 그러니, 이거 내가 혼자 도저히 키울 수 없겠다 싶어 보냈죠.”

“그 후로 연락을 한 적이 있나요?”

“이십여 년 전에 우리 이모를 통해 연락이 닿아서 한번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애가 고등학생 때였죠. 그런데 뭐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두 살 때니까 기억이나 나겠어요. 서먹서먹하지. 잘 지내냐, 건강하냐,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더라고요. 헤어질 때는 연락처도 안 물어봤어요.”

“왜요?”

“내가 물어볼 위치가 안 돼가지고. 수급자 생활을 하다보니까 자신도 없더라고요. 아버지로서 내가 도움이 좀 될 수 있다면 몰라도.
하다못해 내가 비행기 삯이라도 내줄 수 있는 능력이 되면 모르겠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이제 소식도 들을 수 없어요. 미국 시카고에서 미니슈퍼를 하나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애가 살아있다면 지금은 서른여섯쯤 되었을 거예요.”

휴먼스 오브 서울이 글은 ‘휴먼스 오브 서울’(humansofseoul.net)이 쓴 기사입니다. 휴먼스 오브 서울은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 듣는 유명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서울 사람을 위한, 서울 사람에 의한, 서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휴먼스 오브 서울이 길거리 섭외를 통해 시민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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