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맹과 노장 사상에서 배우는 글쓰기

강원국

발행일 2016.07.11 14:13

수정일 2016.07.1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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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뉴시스

강원국의 글쓰기 필살기 (38) 글쓰기에 관한 공자, 맹자, 노자, 장자의 가르침

동양을 대표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단연 공자, 맹자, 노자, 장자가 아닐까 싶다.

이들은 글쓰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글쓰기의 본질은? - 공자

유교 창시자 공자(BC 551년~BC 479년)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爲己之學), 오늘날은 남을 위해 배운다(爲人之學).”

옛 학자는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학문을 했는데(위기지학), 지금은 남에게 과시하고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 공부(위인지학)한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위인지학’하지 말고 ‘위기지학’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이에 관해 퇴계 선생이 자세히 풀어 설명했다.

“위기지학은 먼 곳보다 가까운 데서, 겉보다 속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마음으로 몸소 행하기를 기약하는 것이다.”

반면에 “위인지학은 이름을 구하고 칭찬을 취하는 것이다.”

글쓰기와 관련하여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을 생각해보자.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인지학 글쓰기’ 말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밝혀내는 ‘위기지학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과연 그럴까.

글은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 아닌가.

독자가 없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독자를 위해 쓰는 글이어야 하지 않는가.

도대체 글쓰기는 위기지학이어야 하나, 위인지학이어야 하는가.

글쓰기는 즐거움이다 - 맹자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난 맹자(BC 372년~BC 289년 추정)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형제도 무사한 것, 하늘이나 남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 없는 것,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다.

글쓰기에도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 글을 쓰다 막힌 곳이 뚫리거나 글을 다 썼을 때,

둘째, 잘 썼다는 소리를 들을 때,

셋째, 내가 쓴 글이 크건 작건 변화를 일으키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이다.

옆에서 지켜본 두 대통령은 글쓰기를 정녕 즐겼다.

무엇을 쓸까 생각하는 시간을 즐겼고,

어떻게 끝날지 모른 채 암중모색하며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을 즐겼으며,

다 쓰고 나서 한 자 한 자 고치는 과정을 즐겼다.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는 그 반응이 궁금해 설렜다.

글쓰기는 비움이다 - 노자

도가(道家)의 시조이자 공자의 스승 격이었던 노자(BC 571년~BC 471년 추정)는 <도덕경>에서 허(虛)를 강조했다.

허(虛)는 채우지 않음이다.

비움이다.

가진 것을 다 쓰지 않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여유가 생긴다.

의연함이 나온다.

천박과 급급함에서 벗어난다.

글 쓸 때 노자의 허(虛)를 떠올리면 ​욕심을 누를 수 있다.

있어도 다 쓰지 않는다.

과유불급이다.

또한 허(虛)를 생각하며 위로받는다.

아직 못쓰고 있다면 그 또한 허(虛)일 뿐이다.

조급할 필요 없다.

아직 채울 게 남아 있는 것이다.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글쓰기는 자유다 - 장자

노자와 함께 도가를 형성하고, 맹자와 같은 시대를 산 장자(BC 360년~BC 280년 추정).

<장자> 천하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치언으로 늘어놓고,

중언으로 믿게 하고,

우언으로 그 의미를 넓힌다.”

장자가 말한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巵言)은 무엇인가.

우언은 재미있는 우화 형식의 표현이다.

중언은 유명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표현이다.

치언은 술에 취한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표현이다.

우언은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이며,

중언은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이고,

치언은 꾸미지 않는 진심 그 자체이다.

치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풀어놓은 후,

중언으로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우언으로 알기 쉽게 빗대어 설명한다.

치언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듯이 쓰는 것을 의미하며,

중언은 인용,

우언은 비유다.

장자는 ‘붕(鵬)’이라는 허구적인 새와 메추라기의 비유를 통해 대붕(大鵬)의 자유를 말한다.

창공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9만 리 장천을 솟아올라야 한다.

올라가려면 날개의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큰 바람이 불어야 가능하다.

어렵다.

힘들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는 메추라기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스스로 자처하는 어려움이다,

대붕의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