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배신해? 무서운 집착이 부른 참극

최경

발행일 2016.03.10. 16:30

수정일 2016.03.10. 18:14

조회 1,410

스토커ⓒ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16)

한 10여 년 전부터 ‘스토킹’이라는 낯선 단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토킹’이란 상대방 의사와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계속 따라다니면서 정신적‧신체적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말한다. 짝사랑하는 상대 혹은 헤어진 애인에게 집착을 보이며 전화나 문자메시지, 메일 등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 상대의 뒤를 밟으며 어디든지 나타나서 만나줄 것을 계속 요구하며, 협박이나 자해를 하는 것 등이 모두 스토킹이다. 스토커는 한결같이 자신의 행위가 ‘사랑’이었다 말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위협’이고 소름끼치는 ‘집착’이며 잔인한 ‘범죄’일 뿐이다.

3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 하나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강남의 한 빌딩 안에서 20대 후반의 여성 A씨가 흉기에 수십 차례 찔려 사망한 채 발견된 것이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현장은 그녀의 직장이 있던 빌딩이었고, 살인범은 범행 직후 그녀의 휴대전화까지 챙겨들고 주변을 배회하다 경찰에 검거됐다. 범인 B는 22세의 유학생, 놀랍게도 피해여성 A씨의 옛 제자였다. 살인이 일어나기 4년 전, 고등학교에서 진학상담 교사였던 A씨는 상냥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학생들이 무척 따랐다고 한다. 학생이던 B도 선생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하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집착을 보이며, 마치 연인에게 하듯 A씨에게 문자메시지와 메일을 반복해서 보내기 시작했다.

A씨는 처음엔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거부의사를 밝힐수록 강도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참다못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경고하자, B는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귀가하는 A씨의 목을 조르고 성폭행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었다. 당시 B를 충분히 처벌받게 할 수도 있었지만, A씨는 미성년자라는 점을 고려해 B를 용서했다고 한다. 대신 그의 부모에게 알려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조치했고, 석 달 동안 심리 상담치료를 받은 B는 유학길에 올랐다. 그것으로 A씨를 괴롭히던 스토킹도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4년 뒤, 유학중이던 B에게서 다시 문자와 메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동창생이 그의 집착을 꺾기 위해 A씨가 곧 결혼을 할 예정이니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고 거짓말을 한 것 때문이었다. 동창이 한 선의의 거짓말을 진짜라고 믿은 그는 다시 집요한 행동을 시작했고, A씨가 자신을 배신했다며 살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끝내 학업까지 그만두고 귀국한 B는 그 길로 A씨의 행방을 찾아 연고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지어 A씨의 부모에게까지 찾아와 옛날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듯 눈물까지 보이며 연극을 하면서 A씨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했다. 별 소득 없이 집에서 나온 B, 그 때부터 그는 A씨에게 끔찍한 살인예고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의 직장을 알아내 끝끝내 흉기를 휘두르며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 뒤 재판과정에서 B측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범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1심에서 징역 35년이라는 이례적인 중형을 선고했다. B측은 형량이 과하다며 곧바로 항소했지만, 2심이 진행되던 중 항소를 포기하며 유기징역 35년, 원심이 확정됐다. 그런데 그가 재판부에 제출했던 반성문들을 살펴보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견딜 수 없어서 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살인은 잘못된 것이라 반성하지만, 남녀관계에서 집착은 어쩔 수 없었다는 그릇된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의 지독한 스토킹이 시작되던 그 때 용서하지 않았다면, 경찰에 신고를 했다면 A씨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스토킹이 강력범죄로 이어지지 않는 한, 현행 법적 처벌은 범칙금 8만원이 전부다.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스토킹은 계속되고, 점점 강도가 세져서 결국에는 살인미수,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나흘에 한명 꼴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랑은 절대로 일방통행이 될 수 없다. 상대가 원치 않는 사랑은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착각이고 집착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탈을 쓴 무섭고 잔인한 착각과 집착으로부터 피해자들을 보호할 구체적인 대책이 꼭 필요하다.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스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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