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의 체포부터 장례까지...

시민기자 임영근

발행일 2016.03.02. 15:00

수정일 2016.03.04. 13:20

조회 1,949

지난 1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 ⓒ뉴시스

지난 1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

유관순 열사의 묘가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었다는 기사(☞그냥 지나쳤다면, 이번 삼일절에는 꼭!)를 읽고, 찾아가 보았다. 1920년 10월 14일 이화학당의 교장과 학생들이 장례를 치러줬으며,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 실전(失傳) 되었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도 이곳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 들른 부동산에서 만난 팔십대 중반 어르신이 공동묘지 쪽에 산다며 길을 알려주었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은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그녀가 묻혔던 곳의 위치나 수감 당시의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자는 유관순 열사의 묘를 찾은 이 기회에 그녀가 체포당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용산구에 있는 유관순길

용산구에 있는 유관순길

97년 전 4월1일(음력 3월 1일)에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아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심법원에서 다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가 투옥 중에도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서대문형무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뉴시스

유관순 열사가 투옥 중에도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서대문형무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교장 월터(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했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했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 실전(失傳) 되었고, 유관순 생가가 있었다는 용산구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었다.

역사공원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 추모비

역사공원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 추모비

이태원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에 부군당역사공원이 들어섰고,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코가 잘리고 내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아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곳이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져, 유관순 열사가 가졌던 정신이 많은 이의 귀감이 되길 바라며 공원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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