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나쳤다면, 이번 삼일절에는 꼭!
발행일 2016.02.25. 17:47
[3.1절 기획] (1) 3.1절에 가볼만 한 곳 ①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해 전국에서 독립을 갈망하는 외침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대 규모의 비폭력 만세운동이 시작된 97년 전 서울. 그들의 처절하고도 간절했던 외침을 기억하기 위해 3.1 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았다.
3.1 운동을 처음으로 논의한 곳, 중앙고보 숙직실
“운이 좋은 날에 오신 거예요. 평소에는 개방을 잘 안하거든요”
안국역에서 북촌 방향으로 끝까지 올라가면 외양부터 예사롭지 않은 고등학교가 보인다.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중앙고등보통학교로 개교했다. 지나가던 문화해설가가 평일에는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했다.
중앙고등학교에 위치한 삼일기념관은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이었다. 1919년 1월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교사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를 방문해 유학생들의 독립 운동 계획을 알린 곳이다.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하며 3.1 운동을 처음으로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3.1 운동을 위해 종교들이 뭉친 곳, 유심사
중앙고등학교에서 안국역 방향으로 내려가면 왼편에 ‘유심사’가 있다. 한옥들 사이에 있어 휴대폰과 지도를 갖고서도 찾는데 애를 먹었다. 담벼락에 작은 기념 현판이 걸려 있어 구석구석 살펴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는 마을 주민도 이곳이 삼일운동과 관련된 장소인 줄 몰랐다고 한다.
1919년 2월 28일 늦은 밤, 만해 한용운이 그의 학생들을 이곳으로 급히 불러 모아 독립선언서 작성 배경과 3.1 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 배포를 부탁했다.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였던 ‘유심사’는 당시 불교계 독립 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3.1 만세운동을 위해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 교섭을 마무리한 최린이 한용운을 방문해 불교계의 참여를 허락받은 곳이기도 하다.
민족대표 33인이 마지막으로 모인 곳, 손병희 선생 집터
유심사에서 가회동 성당 쪽으로 길을 건너 조금 내려가면 의암 손병희 선생 집터라고 쓰인 표석이 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제3대 천도교 교조이자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명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손병희 선생 집에서 민족대표들이 거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모였다고 한다.
탑골공원에 있는 손병희 선생 동상을 알고 있는 시민은 많지만, 이곳을 아는 시민은 잘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도 근처를 지나가는 관광객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쳐 갔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 축배를 든 곳, 태화관
가회동에서 인사동 문화의 거리를 내려가면 네거리 근처에 태화빌딩이 있다. 예전에 요리점 명월관의 분점인 ‘태화관’이 있었고,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곳이다. 빌딩 바로 앞에 ‘삼일운동 유적지’라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고 1층 로비 오른쪽 옆 작은 카페 벽에는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명월관은 개점 초기부터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인물들이 출입하였으며, 후기에는 문인·언론인들과 국외에서 잠입한 애국지사들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1918년 명월관이 소실되자 뒤에 ‘태화관’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은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이다.
이날 손병희를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은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고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경찰에 연행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배부 받은 곳, 승동교회
태화관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승동교회’는 기다란 통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면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위치상 탑골공원에 인접해 3.1운동의 본거지로 적합했다. 3.1운동 당시 승동교회에서 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 받았으며, 이로 인해 일본경찰들에게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끌벅적한 인사동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한적하여 쓸쓸함마저 감돈다.
유관순 열사가 묻힌 곳, 부군당 역사공원
삼일절을 맞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이태원이라면 다들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이태원 공동묘지는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처음 안장한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가을 부군당 역사공원에 유관순 추모비와 유관순 길이 생겼다. 추모비가 세워지고 맞는 첫 삼일절이니, 이곳을 꼭 들르고 싶었다.
남산의 N서울타워와 한강의 63빌딩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을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하지만 유관순 추모비를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추모비에 적힌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이 한참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독 차가운 바람이 매서웠던 주말, 북촌과 종로, 이태원 등지를 돌아다니고 집에 와보니 발에 상처가 나고 피가 맺혀 있었다. 생각보다 먼 길이었나 보다. 독립을 외치기 위해 그 옛날 변변치 않은 신발로 고르지 못한 길을 마음 졸이며 수없이 지나다녔을까. 현재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괴로움을 견디며 언젠가 올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던 간절한 마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이 있음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면 좋겠다. 서울시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까지 탐방로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어느 한곳 빠지는 곳이 없으면 하는 기대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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