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白飯)'은 흰밥이 아니다?
서울식품안전뉴스
발행일 2016.01.22. 16:04
오늘날 우리 밥상이 흐트러진 것은 백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식 밥상의 중심은 ‘밥’이다. 밥과 국은 한식 밥상의 기본이다. 밥은 음이고 뜨거운 국은 양이다.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룬다. ‘평(平)’이다. 한식의 밥상은 밥과 국이 평을 이룬 밥상이다.
백반은 흰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백반(白飯)’은 흰밥이 아니다. 사전에도 백반은 흰밥이라고 적혀 있지만 백반은 흰밥이 아니다. 백반이 흰밥이면 ‘백수(白手)’는 하얀 손이다. 백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팽팽 노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반은 아무런 반찬이 없는 밥상을 이르는 표현이다. 백숙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규합총서> 등에 나타나는 ‘연계백숙(軟鷄白熟)’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삶은 닭이 아니다. 아무런 것도 넣지 않고 맹물에 삶은 닭을 말한다. 그렇게 삶아서 부드럽게 만들면 연계백숙이다.
‘백반=흰쌀밥’이라고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27년(1701년) 10월 3일의 기록이다. 이날의 기록은 희빈 장 씨의 잘못에 대한 ‘결안(結案)’이다. 결안은 최종 판결문이나 사형선고문의 의미다. 그동안 희빈 장 씨의 잘못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여 기록한 것이다.
“(전략) 의복을 들여간 뒤에 혹은 백반(白飯)이나 혹은 두병(豆餠)을 때때로 내보내었는데, 물어보았더니, ‘취선당의 신당(神堂)에서 기도할 때에 바친 물건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후략)”
취선당은 희빈 장 씨의 처소다. 이곳에 신당을 차려 놓고 중전을 저주했다. 이때 ‘흰 쌀밥=백반’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백반과 취선당의 백반은 다르다. 취선당의 백반은 신당에서 기도할 때 사용한 흰쌀밥이나, 우리가 먹는 백반은 흰 쌀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백반’은 반찬이 없는 밥상이다. 흔히 ‘3첩 반상’ ‘7첩 반상’ 식으로 이야기한다. ‘첩’이라는 표현은 중국식이다. ‘기(器)=그릇’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밥 한 그릇, 국[羹, 갱] 한 그릇에 ‘기’라고 부를 만한 별다른 ‘반찬’이 없는 것이 백반이다. 장(醬), 지(漬), 초(醋)는 ‘반찬’으로 셈하지 않는다. ‘장’은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등 모든 장류를 뜻한다. 밥상에 장이 있다고 해서 반찬으로 셈하지 않는다. ‘지’는 김치, 겉절이, 장아찌 등 모든 채소 절임, 채소 삭힘 음식을 뜻한다. 김치와 장아찌 등은 반찬으로 셈하지 않는다. ‘초’는 식초다. 마찬가지로 반찬이 아니다. 굳이 반찬이라고 우길 때는 ‘밑반찬’이라고 표기한다. 가끔 “밑반찬 거리를 마련한다”고 이야기할 때의 바로 그 반찬이다.
국, 장, 지, 초 등만 덩그렇게 있는 밥상이 바로 “아무 것도 차린 것이 없는 밥상=백반”이다. 우리가 흔히 손님을 초대한 후 “아무 것도 차린 것이 없다”라고 하거나 “차린 것이 없지만 많이 드시라”고 하는 것은 장, 지, 초, 국 이외에 별다른 반찬이 없다는 겸양의 인사다.
절제의 미덕 강조한 조선 왕실의 밥상
밥상의 중심은 물론 하얀 밥이다. 한식은 한상차림이 원칙이다. 밥을 중심으로 국을 놓고 장, 지, 초를 갖춘다. 백반의 밥상이다. 여기에 우리가 ‘요리’라고 부르는 반찬을 하나 놓으면 ‘1기 밥상’이다. 우리는 흔히 국왕은 ‘7기 밥상을 먹고’라고 표현하지만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한식의 기본 정신은 절제다. 먹을 수 있지만 먹지 않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 국왕의 밥상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낸다. 기우제를 지내기 전 국왕은 음식 가짓수를 줄인다. ‘소선(素膳)’이다. 소박한 밥상을 받는다. 고기를 멀리하고 심지어는 두부까지 줄인다. 궁중에 상이 나면 역시 국왕은 반찬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백반 정도를 먹는다. 최소한 ‘육선(肉饍)’을 하지 않는다. 육선은 고기반찬이다.
3남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태종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태자 충녕대군이 운동을 하지 않고 책만 보는 것이었다. 태종은 전쟁터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서 동북면의 여진족 퇴치나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 고려 말기 과거를 통하여 문신으로 정계에 나섰지만 무인의 이미지가 강했다. 아들 세종은 책만 열심히 보면서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책을 보는 일이 너무 심하다는 점이었다. 저러다 병나겠다 싶을 정도로 공부만 했다. 게다가 비만체질이었다. 세종이 노년에 당뇨병을 비롯하여 숱한 병을 앓고 ‘움직이는 종합병원’이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세종은 육선을 좋아했다. 문제는 궁궐에서 상을 만나면 국왕은 육선을 비롯하여 기름진 음식, 좋은 반찬은 멀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세종 4년(1422년) 5월10일(음력)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는 태종의 장례를 맞아 세종이 미음 정도만 먹었다고 적혀 있다. 소선을 했다는 뜻이다. 아마 백반 정도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세종이 소선을 거두지 않자 신하들이 나선다. “일반 민가에서도 장례를 치르고 나면 상주가 병이 난다. 하물며 위로는 하늘을 받들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다스려야 할 국왕이 오랫동안 음식 가짓수를 줄여서 혹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지금이라도 육선을 시작하시라”고 말한다. 세종의 대답은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신하들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라”는 것이다. 이때 ‘선왕(태상왕) 태종의 유언’이 등장한다. 내용은 엉뚱하다. “내가 죽고 나서 혹시라도 세종이 음식을 먹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니 고기를 먹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고기반찬을 좋아하는 아들이 분명히 자신의 장례를 맞아 고기를 먹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한 아버지의 유언인 셈이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백반집 소개
절제하는 밥상인 한식의 기본은 역시 ‘백반’이다. 흔히 밥만 맛있으면 식사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이들도 많다. 한식 밥상의 기본이 ‘밥’인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강화도의 ‘우리옥’은 해산물이 있는 백반집이다. 역시 별다른 반찬은 없다. 젓갈이 눈에 띄지만 역시 ‘장(醬)’이다. 젓갈은 생선으로 만든 장이다. 겨울철 김장김치가 맛있고 별다른 반찬 없이 밥을 잘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업력 50년을 넘긴 노포다. 강화도 시장통에서 상인들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백반집이 되었다. 한때는 가마솥밥으로도 유명했다.
경기도 포천의 ‘욕쟁이할머니집’ 역시 백반집이다. 시래기된장국이 맛있다. 밥과 더불어 나오는 국은 반찬으로 셈하지 않는다. 푸근한 백반집인 셈이다. 별도로 고기반찬을 청할 수도 있다. 고기반찬이 더해지면 역시 ‘1기 밥상’이다. 두부도 별도 주문이 가능하다.
서울 아현동의 ‘착한밥상’도 백반집이다. 매일 밑반찬이 달라진다. 정성이 가득한 밥상이다. 백반에 생선 한 토막을 더한다. 굳이 따지자면 ‘1기 밥상’이지만 역시 백반집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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