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첫사랑을 당신은 아십니까?
최경
발행일 2016.01.14. 16:18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8)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누구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져’ 버린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만약 사랑 따윈 빛바랜 단어로 여길 것만 같은 연로한 부모님이 첫사랑에 대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중년의 딸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몇 달 전, 팔순이 가까운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부쩍 옛날이야기를 봇물처럼 쏟아놓는다는 것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늘 익숙하게 들어왔던 터라 그냥 귀를 열고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헛헛해하는 노모를 위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난생처음 노모의 오래된 첫사랑, 딸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어색한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배움이 흔치 않던 시절, 당시로선 드물게 여자는 대학을 다녔다. 남녀 간의 우정도 쉽지 않던 그때, 같은 대학생이던 청년이 바로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맏이었던 여자에게는 동생들이 많았고, 장남이었던 그 남자 역시 어린 동생들이 많았으며, 어렵게 대학을 다니긴 했어도 가난이 일상이던 그 시절 미래에 대한 보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때가 되면 여자는 응당 시집을 가야하고, 때가 되면 남자는 응당 취직을 해야 사람구실을 하는 것이라 여겼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남자는 장교시험을 봐 군대를 가게 됐고, 그 즈음 여자가 처음으로 물었다고 한다.
“내가 기다릴까?...”
요즘 같으면 돌직구로 물었을 텐데, 그 옛날 여자가 마음을 겨우 드러내며 물었다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이다.
“... 아니, 기다리지 마.”
남자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게 될지, 군대에 다녀와서 또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며 살게 될지, 어린 동생들 공부는 또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20대 중반이 돼가는 여자를 무작정 묶어둘 수만은 없다 여겼을지 모른다. 여자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한 것이 자존심이었는지, 배려였는지 아니면 여자와 다르게 남자에겐 마음이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여자는 한 남자로 향하던 ‘날카롭고, 뜨겁고, 아프던’ 그 첫사랑을 ‘기다리지 말라’는 그 한마디에 접고 말았다. 그 후로 각자의 인생은 서로 만날 일도 부딪힐 일도 전혀 없는 먼 길로 향해갔다. 대학을 졸업한 여자는 집안의 성화에 떠밀려 좋다고 쫓아다니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간간이 바람결에 첫사랑 그 남자가 군대를 제대한 뒤 장학금을 받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여자는 아이들을 낳아 길렀으며 어느새 자식들은 첫사랑을 하던 푸르던 날의 그녀처럼 대학생이 돼, 마치 저 혼자 큰 것 마냥 으스대며 부모 품을 떠날 채비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신문에서 남자가 쓴 책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됐고, 서점에서 그가 쓴 책을 사서 남자가 있는 직장으로 보냈다고 한다. 거기엔 ‘아주 오래 전, 나를 기억한다면 당신이 쓴 이 책에 사인을 해서 보내달라’는 편지를 함께 넣어 보냈다. 얼마 후, 여자의 집으로 우편물이 도착했다. 그 속엔 그녀가 보냈던 두꺼운 책이 들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을 여자... 책 첫 장에는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참... 오랜만이라고 안부를 묻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말과 함께 남자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서명이 전부였다. 여자는 그 책을 마치 비밀스러운 보물처럼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렇게 다시 2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여자는 할머니가 됐다. 무심하게 흘러버린 시간과 가버린 청춘에 새삼 추억을 묻는 것조차 민망할 만큼 많은 것들이 변했고, 멀어졌고, 사라져버렸다. 할머니가 된 여자가 낡은 서랍 속에서 그 책을 다시 꺼내든 것은 남편도 떠나고, 반평생 넘게 만나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면서였다. 할아버지가 된 첫사랑의 그 남자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문득 궁금했지만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딸이 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라고 했다. 참 맹숭맹숭하게 싱겁고, 미련하고 고리타분한, 한편으론 순수하고 점잖은 첫사랑 이야기.. 그런데 딸이 고민한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노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혼자 온갖 검색과 수소문을 통해 할아버지가 된 그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내긴 했는데, 이걸 노모에게 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딸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랬다.
그 ‘남자’는 퇴직을 한 뒤, 친구들과 산행을 하는 것을 낙으로 하루하루를 소일하며 보냈는데,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갑자기 쓰러졌고, 몇 달을 병원에서 의식 없이 누워 있다가 이미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 전 첫사랑 ‘여자’가 당신의 친필 서명이 선명한 그 책을 비서(祕書)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안부를 궁금해 한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그는 먼저 먼 길을 떠났다.
한동안 고민을 했다는 딸은 그 남자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차마 노모에게 알려줄 수 없노라고 했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노부모가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래도록 품어온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떻게 했을까? 결론은 다 다를 것이다. 다만... 세상의 모든 첫사랑은 그렇게 못 다한 이야기를 남긴 채, 거역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흩어지고 사라져 버릴 뿐이다.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첫사랑도 예외 없이. 분분한 낙화처럼 눈발이 흩어지는 이 겨울, 갑자기 시 한 자락이 떠오른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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