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야말로 ‘인간의 조건’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10.17. 18:35

수정일 2015.11.16. 06:14

조회 448

다시 생각합시다ⓒ곰돌
생각은 진실로 이끌지 않는다. 진실이 생각의 시작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45

한자어인 진실(眞實)을 영어로 번역하면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단어들이 나열된다. honest, 정직하다는 의미가 진실 속에 담겨 있다. truth, 진상 또는 진리도 본질적으로 진실과 비슷하다. fact, 사실은 진실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라 할 만하다. frank, 가식이 없는 솔직함이야말로 진실의 기본이다. sincere, genuine, 감정과 신념과 행동에 있어 진심어린 마음이야말로 진실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 속에서 진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정직과 진리와 사실과 솔직함과 진정에 대한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것들의 뜻을 분명히 알고 다짐하고 있어야만 진실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순서를 전복해버린다.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사실에 충실하고, 솔직하고 진정해야만 진실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진실해야만 비로소 그런 진실을 닮은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한 듯 간단치 않다.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말이다. 머리로 하는 생각과 온몸으로 깨닫는 진실, 이상과 현실, 말과 행동은 단순한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유대계 독일 철학자이다. 한때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가 심문을 받기도 했던 그녀는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그것을 기사로 쓴 후, 도리어 시온주의자들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고 프랑스로 미국으로 망명을 거듭한다. '진실'을 밝힐 '생각'에만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을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을 '악마'로 만들고 싶어 한다. 우리와 전혀 닮지 않은 별종의 악인, 지옥에서 걸어 나온 악귀로 취급해버리려 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재판정에서 만난 아이히만은 다만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이히만은 그저 국가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한나 아렌트는 그의 죄가 '철저한 무사유(Sheerthoughtlessness)'임을 밝힌다.

"생각하는 일은 (...중략...)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저명한 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누구나 '악마'가 되어버릴 수 있으며, 그 생각 또한 얼마든지 권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그래서 오로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것만이 진짜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진실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취생몽사(醉生夢死)로 흐리멍덩하게 살아가기 너무 쉬운 세상이다. 생각은 괴롭다. 진실은 더 괴롭다. 그럼에도 내 힘으로 생각해야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남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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