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역 이름에 이런 사연이? 역명에 담긴 서울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7.29. 16:03
AI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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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시작해 수도권 전철 1호선 남쪽 역명들을 따라가며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살폈다. 서울역, 남영역, 용산역, 노량진역부터 금천구청역까지 각 역명에 담긴 유래와 주변 지역의 변천을 소개한다.

구 서울역
127화 역명이 품은 역사와 문화 이야기(1)
서울이 발전해 온 역사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도권 전철역 이름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대부분의 전철역 이름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수도권 전철 1호선을 따라가 보면서 서울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이 발전해 온 역사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도권 전철역 이름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대부분의 전철역 이름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수도권 전철 1호선을 따라가 보면서 서울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도권 전철의 개통과 서울역
수도권 전철이 처음 개통된 것은 지금부터 1974년 8월 15일로 서울역에서 청량리역을 잇는 7.8km의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운행을 시작했다. 지하철은 1호선을 시작으로 이제는 9호선까지 운행되고 있다. 1호선 서울역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이어지는 역명들을 따라가 보자.
서울역은 1925년 9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도로면에서 볼 때 2층, 철로에서 볼 때 3층 구조이다. 서울역은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으로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뛰어난 외관을 갖고 있어서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7년에는 민자역사 시공에 착수하여 1989년에 준공하였다.
서울역은 1925년 9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도로면에서 볼 때 2층, 철로에서 볼 때 3층 구조이다. 서울역은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으로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뛰어난 외관을 갖고 있어서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7년에는 민자역사 시공에 착수하여 1989년에 준공하였다.
서울역 남쪽에 위치한 역명들
서울역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가보자. 서울역 남쪽 첫 번째 역은 남영역(南營驛)이다. 남쪽에 군영(軍營)이 있어서, 남영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주둔지가 있었으며, 광복 이후 미군기지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남영역은 용산구 갈월동에 있다. 갈월동(葛月洞)의 유래에 대해서는 마을 주변에 칡(葛)이 무성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이곳에 갈월도사(葛月道士)가 살았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현재 남영역에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부기되어 있다. 남영역 인근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대표적 공간인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다가, 국가폭력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이곳은 옛 건물을 보존하고 전시·교육 시설을 더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조성되었다.
남영역 다음은 용산역(龍山驛)이다. 용산은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는 관문으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남호(南湖)라고도 불렀으며, 팔도의 조운선이 모여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용산창(龍山倉)이 있었다.
정조 때 배다리를 건설하여 한강을 건넌 곳도 용산과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구간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용산역이 크게 발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경의선 부설 계획은 구 서대문역에서 출발하는 노선이었으나,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현재 남영역에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부기되어 있다. 남영역 인근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대표적 공간인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다가, 국가폭력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이곳은 옛 건물을 보존하고 전시·교육 시설을 더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조성되었다.
남영역 다음은 용산역(龍山驛)이다. 용산은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는 관문으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남호(南湖)라고도 불렀으며, 팔도의 조운선이 모여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용산창(龍山倉)이 있었다.
정조 때 배다리를 건설하여 한강을 건넌 곳도 용산과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구간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용산역이 크게 발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경의선 부설 계획은 구 서대문역에서 출발하는 노선이었으나,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노량진 쪽에서 바라본 한강 전경
용산역을 출발해 한강철교를 지나면 동작구 노량진역(鷺梁津驛)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노량(露梁), 노량(鷺梁)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노량진은 한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촌락으로, 한강진, 양화진과 더불어 한양을 오가는 주요 길목이면서, 군사적 요충지였다. 1899년 9월에는 노량진역과 제물포역을 연결하는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노량진역 다음은 대방역(大方驛)이다. 대방역은 영등포구 신길동과 동작구 대방동에 걸쳐있는데, 개업 당시엔 역 시설물 전체가 관악구 대방동에 속했기 때문에 현재의 명칭이 정해졌다. 대방동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번대방리(番大方里)라고 일컫다가, 해방 후에 대방동이라 고친 것에서 유래한다.
신길역(新吉驛)은 처음 1호선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1996년 8월에 이곳에 5호선 역이 설치되면서 환승을 위해 1997년 4월에 1호선 역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신길동은 서울로 들어오는 방학호진(放鶴湖津)이라는 나루터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는데, 새로운 좋은 일들이 포구에 많이 일어나라는 뜻으로 신길이라는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신길역을 지나면 영등포역(永登浦驛)이 나온다.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소재한 영등포역은 철도가 처음 개통된 1899년 9월 경인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1936년 4월 경인선에서 경부선으로 편입되었다. 1938년 남경성역으로 개칭되었다가 1943년 영등포역으로 환원하였다. 1950년 6월 6·25전쟁으로 역사(驛舍)가 파괴되어 1965년 새 철근콘크리트 역사로 신축되었다.
‘영등포’란 지명의 유래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무속 신앙으로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날이라 하여 무당이 보름동안 영등굿을 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의 배가 드나들면서 ‘영등굿을 하던 포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노량진역 다음은 대방역(大方驛)이다. 대방역은 영등포구 신길동과 동작구 대방동에 걸쳐있는데, 개업 당시엔 역 시설물 전체가 관악구 대방동에 속했기 때문에 현재의 명칭이 정해졌다. 대방동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번대방리(番大方里)라고 일컫다가, 해방 후에 대방동이라 고친 것에서 유래한다.
신길역(新吉驛)은 처음 1호선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1996년 8월에 이곳에 5호선 역이 설치되면서 환승을 위해 1997년 4월에 1호선 역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신길동은 서울로 들어오는 방학호진(放鶴湖津)이라는 나루터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는데, 새로운 좋은 일들이 포구에 많이 일어나라는 뜻으로 신길이라는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신길역을 지나면 영등포역(永登浦驛)이 나온다.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소재한 영등포역은 철도가 처음 개통된 1899년 9월 경인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1936년 4월 경인선에서 경부선으로 편입되었다. 1938년 남경성역으로 개칭되었다가 1943년 영등포역으로 환원하였다. 1950년 6월 6·25전쟁으로 역사(驛舍)가 파괴되어 1965년 새 철근콘크리트 역사로 신축되었다.
‘영등포’란 지명의 유래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무속 신앙으로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날이라 하여 무당이 보름동안 영등굿을 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의 배가 드나들면서 ‘영등굿을 하던 포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신도림역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등포역 다음은 1984년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고, 1호선과 환승하는 역이 되면서, 최대의 교통 중심지가 된 신도림역(新道林驛)이다. 신도림역은 구로구 신도림동에 위치해 있다. 도림동과 신도림동의 명칭은 모두 이 지역 뒤쪽 야산의 모습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되미리’, ‘도지미리’라고 표기하던 것이 발음하기 편한 ‘도림리’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1936년 도림리 중에 지금의 문래동, 도림동 영역이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신도림동’의 이름이 붙여졌다.
1936년 도림리 중에 지금의 문래동, 도림동 영역이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신도림동’의 이름이 붙여졌다.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 구로역
구로역(九老驛)은 구로구 구로동에 소재하고 있는데, 경부선, 경인선 방면으로 향하는 수도권 광역전철의 주요 환승역으로 이용되고 있다. 구로동의 명칭은 ‘9명의 장수 노인이 이곳에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조선후기 영조 때 까지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구로리(九老里)였다가, 정조 때 경기도 시흥현(始興縣) 구로리가 된 후 ‘구로’라는 지명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구일역(九一驛)은 구로구 구로동에 소재하며, ‘구로 1동’의 줄임말이다. 1995년 2월 구로역과 개봉역 사이에 설치되었으며, ‘동양미래대학’이 부기되어 있다. 구일역 다음의 개봉역(開峰驛)은 구로구 개봉동에 소재하고 있다. 개봉동의 명칭은 남쪽의 개웅산(開雄山)과 북쪽의 매봉산(每奉山)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오류동역(梧柳洞驛)은 1899년 9월 경인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한 유서 깊은 역이다. 오류동은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이다.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에서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를 거쳐, 1980년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오류역 다음 온수역(溫水驛)은 구로구 온수동에 위치하며, 지하철 7호선 환승역이다. 온수동은 조선 초기까지 이 일대에 더운 물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한다. 수도권 1호선 개통 당시에는 없었다가, 1988년 처음 개통되었다. 경기도 부천시와 접경 지역으로 온수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경기도 지역이 된다.
구일역(九一驛)은 구로구 구로동에 소재하며, ‘구로 1동’의 줄임말이다. 1995년 2월 구로역과 개봉역 사이에 설치되었으며, ‘동양미래대학’이 부기되어 있다. 구일역 다음의 개봉역(開峰驛)은 구로구 개봉동에 소재하고 있다. 개봉동의 명칭은 남쪽의 개웅산(開雄山)과 북쪽의 매봉산(每奉山)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오류동역(梧柳洞驛)은 1899년 9월 경인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한 유서 깊은 역이다. 오류동은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이다.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에서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를 거쳐, 1980년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오류역 다음 온수역(溫水驛)은 구로구 온수동에 위치하며, 지하철 7호선 환승역이다. 온수동은 조선 초기까지 이 일대에 더운 물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한다. 수도권 1호선 개통 당시에는 없었다가, 1988년 처음 개통되었다. 경기도 부천시와 접경 지역으로 온수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경기도 지역이 된다.
구로역 남쪽 경부선의 역명들
구로역은 경인선과 경부선으로 분기(分岐)가 되는데, 구로역 남쪽 경부선에도 서울시에 소재한 가산디지털단지역, 독산역, 금천구청역이 있다.
가산(加山)디지털단지역은 1974년 지하철 1호선의 개통과 함께 구로구 가리봉역(加里峰驛)으로 시작하였다. ‘가리봉동’은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의 봉우리란 뜻으로, 가리봉동이 그 갈라진 부분에 위치해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95년 가리봉동의 대부분 지역이 금천구 가산동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역명은 유지되었다. 가산동은 가리봉동의 ‘가’와, 독산동의 ‘산’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역 주변에 오랜 기간 공단 시설이 조성되었다가 이곳이 디지털 정보통신 산업의 중심지로 바뀌면서 2005년 7월 역명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꾸었다.
독산역(禿山驛)은 신설된 역으로, 1998년 1월 경부선 간이역으로 처음 영업을 시작하였다. 독산동에서 역명이 유래하였는데, 독산동의 독(禿)자는 ‘대머리’라는 의미로, 마을의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산동은 1963년 영등포구 독산동, 1980년 구로구 독산동을 거쳐, 1995년 금천구 독산동이 되었다.
가산(加山)디지털단지역은 1974년 지하철 1호선의 개통과 함께 구로구 가리봉역(加里峰驛)으로 시작하였다. ‘가리봉동’은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의 봉우리란 뜻으로, 가리봉동이 그 갈라진 부분에 위치해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95년 가리봉동의 대부분 지역이 금천구 가산동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역명은 유지되었다. 가산동은 가리봉동의 ‘가’와, 독산동의 ‘산’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역 주변에 오랜 기간 공단 시설이 조성되었다가 이곳이 디지털 정보통신 산업의 중심지로 바뀌면서 2005년 7월 역명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꾸었다.
독산역(禿山驛)은 신설된 역으로, 1998년 1월 경부선 간이역으로 처음 영업을 시작하였다. 독산동에서 역명이 유래하였는데, 독산동의 독(禿)자는 ‘대머리’라는 의미로, 마을의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산동은 1963년 영등포구 독산동, 1980년 구로구 독산동을 거쳐, 1995년 금천구 독산동이 되었다.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모습
독산역 다음의 금천구청역(衿川區廳驛)은 경부선 구간에서 서울시에 소재한 마지막 역이다.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하며, 인근에 금천구청이 있어서, ‘금천구청역’이란 이름이 붙었다. 1908년 4월 시흥역(始興驛)으로 출발했고,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 전동차가 정차하기 시작했다. 1981년 새로운 역사가 준공되었고, 2008년 금천구청역이라 하였다. 경기도 시흥시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상황에서, 시흥역 인근에 금천구청 청사가 이전해 오면서 주민들의 지지로 금천구청역이 되었다. 1795년 정조가 화성 행차 때 임시로 머물렀던 시흥행궁이 인근에 있는데, 금천구에서는 해마다 금천구청 입구 삼거리에서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제까지 서울역을 중심으로 남쪽에 소재한 전철의 역명들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만을 살펴보면서 서울이라는 도시가 팽창하고 발전하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역명이 품은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이제까지 서울역을 중심으로 남쪽에 소재한 전철의 역명들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만을 살펴보면서 서울이라는 도시가 팽창하고 발전하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역명이 품은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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