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아이들의 삶에 위로가 되는 놀이공간이란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4.02.16. 14:30

수정일 2024.02.16. 17:33

조회 1,825

아늑하게 놀이가 모이는 모이 놀이풍경의 디자인 모형. 설계 및 사진
아늑하게 놀이가 모이는 모이 놀이풍경의 디자인 모형. 설계 및 사진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22) 놀이풍경이 위로를 담을 수 있다면

놀이터라고 해서 꼭 규모가 커야만, 다양한 놀이 기구들이 가득 차 있어야만 다음세대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산이 풍부하고 장소가 여유가 있다면 더 훌륭한 놀이터를 지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작은 규모여도 그 장소에서 꼭 맞고 그 안에서 노는 다음세대가 중심인 놀이터를 우리는 ‘놀이풍경’(Playscape)라고 부르고, 참여 디자인 워크숍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는 과정을 거쳤다. 필자와 건축사무소 EUS+가 설계한 이 ‘모이 놀이풍경’의 의미와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닭장 같은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놀이풍경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고민의 근본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싶었다.  

우주선? 새로운 지형?

이 놀이풍경이 세워진 학교의 학생들은 마치 우주선이 착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름을 ‘해솔 꿈터’라고 정했다고 한다. 요즈음은 관리 차원에서 종종 꺼려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곳은 바닥 전체를 고운 모래로 푹신하게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경사진 판들을 배치했다. 

그 중 일부는 탄성고무, 목재데크, 놀이네트로 마감이 되어있어 연속되면서도 다양한 놀이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게 설계했다. 그 구조물이 독특한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아늑한 공간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배경에 있는 아파트의 모습은 전국 어디나 비슷하지만 이 놀이풍경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를 제공한다.
배경에 있는 아파트의 모습은 전국 어디나 비슷하지만 이 놀이풍경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를 제공한다.
모래 위 독특한 형태를 가진 모이 놀이풍경.
모래 위 독특한 형태를 가진 모이 놀이풍경.

접근하는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기존의 평평한 운동장 놀이기구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입체감이 생겼다. 

놀이풍경에도 ‘뼈대’가 있다

이 놀이풍경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여러 스터디 모형을 만들었다. 이 모형은 건축가들이 토론하며 더 나은 방향을 정하거나, 시공 현장에서 명확한 의도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 

특히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명확한 힘의 전달과 어떻게 놀이풍경이 서 있을 수 있는지 뼈대를 통해 이해를 돕는다. 건축교육 측면에도 유용하다. 
모이 놀이풍경의 구조 모형과 3D 모델링 이미지.
모이 놀이풍경의 구조 모형과 3D 모델링 이미지.
기울어진 한쪽 판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있어서 들락날락 하며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기울어진 한쪽 판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있어서 들락날락 하며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구멍과 경사판

양쪽이 기울어진 판이다 보니 가운데가 일종의 무대로 사용이 될 수도 있다. 한쪽 판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반대편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고 그 위에 해먹처럼 걸터앉을 수 있다. 암벽 홀더와 파이프를 잡고 끝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큰 활동과 세밀한 활동 등 다양한 놀이가 가능한 기울어진 판.
큰 활동과 세밀한 활동 등 다양한 놀이가 가능한 기울어진 판.

높이가 다른 위치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놀이가 될 수 있다. 또한 아이들 서로 간에 입체적인 시선이 교차하며 공간감과 창의적 사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서로 도와주고 밀어주며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그들만의 놀이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짓고 그 자체가 놀이풍경이 되는 것이다.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종종 이곳에 올라 친구와 이야기 나눈다.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종종 이곳에 올라 친구와 이야기 나눈다.

반대쪽에는 그물로 모래사장까지 연결이 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고 신체의 활용 방법을 터득한다. 그러면서 매번 다른 상황에 대처하는 힘을 키우게 된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게 되면서 기존의 아파트 단지나 상가, 학교, 학원 등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곳이니 분명 기억에 많을 것이다.  
반대 쪽에는 그물로 되어있는 언덕이 마주하고 있다.
반대 쪽에는 그물로 되어있는 언덕이 마주하고 있다.

주변 모래 위에서는 잘 달리고 판 위에서는 도전의식을 느끼며 속도와 행동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학교 학생들과 4주간 함께 한 참여 디자인 워크 모습.
이 학교 학생들과 4주간 함께 한 참여 디자인 워크숍 모습.

학생 참여 디자인 워크숍 과정

이 놀이풍경은 한 신도시 아파트 단지 내의 초등학교에 세워졌다. 신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고 아파트 브랜드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대화에 쓰는 학생들을 구상단계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필자와 EUS+는 이를 위해서 그 학교가 위치한 문맥과 주변상황, 그리고 그 학교 커뮤니티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 학교만을 위한 새로운 워크숍 방법을 개발했다. 

4주간 디자인 워크숍을 하며 학생들과 의견 나누기, 대지 답사를 포함한 단계적 그리기, 개인별 의견을 모둠별로 모아 꼴라주하기, 모형으로 만들기 등의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 그러면서 학교 구성원인 학생들은 이 작은 놀이풍경이 여러 사람의 노력과 의견으로 신중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자신도 그 한 부분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필자가 건축가로서 워크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에게 던진 질문 두가지.
필자가 건축가로서 워크숍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에게 던진 질문 두가지.

우리는 먼저 학생들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신도시 키즈들인 이들의 의식 속에 있는 놀이터에 대한 생각과 놀이에 대한 희망을 읽기 위해서였다. 각각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준 의견들은 놀라움이 가득했다. 
어린이들이 질문에 직접 써준 답변들.
어린이들이 질문에 직접 써준 답변들.

이런 의견들을 단지 받아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놀이풍경 디자인의 중요한 ‘지향점’ 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건축가의 시선에서 재해석을 해보았다. 예를 들면, 놀이터는 ‘인생’이라고 쓴 친구는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만든다면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고, 놀이터는 ‘위로’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친구에게는 혼자서만 노는 놀이터가 아니라 서로 도울 수 있는 구조가 되어있는 놀이터라면 위로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이터는 [  ] 이다”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을 건축가인 본인이 재 해석한 내용.
“놀이터는 [ ] 이다”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을 건축가인 본인이 재 해석한 내용.
“우리학교에서는 [   ] 놀이를 하고 싶다”라는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과 건축가의 재 해석.
“우리학교에서는 [ ] 놀이를 하고 싶다”라는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과 건축가의 재 해석.

아이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일반 수업시간과 달리 자유가 많고 무엇이든 창작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기도 했지만 기존 신도시 아파트, 학원 등에서 벌어지던 일상생활의 반대급부가 표현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들의 에너지와 소통을 조절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빠건축가들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참여 디자인 워크에서의 학생들의 스케치와 꼴라쥬, 모형 작업 등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참여 디자인 워크숍에서의 학생들의 스케치와 꼴라쥬, 모형 작업 등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그린 놀이터에는 많은 바람이 담겨있다. 체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 애쓴 흔적도 있다. 그런 개인적인 바람들이 친구들과 모둠을 이뤄 다시 구성해 보면서 서로 조절하고 합쳐가는 훈련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모형을 만들어보았다. 재료를 다양하게 주기보다 한정적으로 제공하여 과도한 표현보다는 좀 더 집중력있게 자신들의 공간적, 놀이적 바람을 표현하게 하였다. 

주변의 문맥과 놀이풍경

신도시가 세워지기 이전 이곳에는 산도, 구릉도 있었다고 한다. 그곳을 평평하게 밀고 세운 아파트들에 사는 아이들이 평지 위에 놓인 놀이기구에서 놀면서, 닭장 같은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삶에서 놀이풍경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고민의 근본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싶었다. 
신도시에서 사라진 원래의 지형도 이 독특한 놀이풍경에 영감을 주었다.
신도시에서 사라진 원래의 지형도 이 독특한 놀이풍경에 영감을 주었다.

학생들과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건축가인 우리들은 여러가지 실제적인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면서 우연히 이 학교의 교표를 보게 되었다. 대부분 학교들은 교표라는 상징 로고를 갖고 있으나 크게 신경 써서 만든 교표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분위기를 풍기는 교표, 디자인 원칙에 맞지 않는 교표, 조잡한 이미지들이 들어가 있는 교표 등 학교 구성원이 자부심을 느낄 만한 교표는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학교는 생긴지 얼마 안 된 곳이어서 그런지 나름대로 세련된 교표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모이 놀이풍경을 설계한 EUS+ Architects의 디자인 개념을 설명하는 다이어그램. 학교 교표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모이 놀이풍경을 설계한 EUS+ Architects의 디자인 개념을 설명하는 다이어그램. 학교 교표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학교 이름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도형이 교표 안에 있길래, 그것을 사용하여 입체적으로 구성해 보며 참여 디자인 워크숍에서의 학생들 의견과 생각, 그 안에 놀 아이들을 상상하며 디자인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평면적인 신도시에 아이들을 위한 입체적인 굴곡을 가진 놀이풍경이 만들어졌다. 

미국과 일본의 놀이를 담은 새로운 지형

이렇게 높낮이를 다양하게 만드는 인공 지형의 놀이풍경은 여러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 주변에는 1960년대부터 건축가 ‘리차드 다트너(Richard Dattner)에 의해 여러 개의 놀이풍경이 생겨났다. 그중 ‘모험 놀이터 (Adventure Playground)’는 당시 뉴욕 길바닥을 포장하는데 사용하던 ‘코블스톤’을 그대로 놀이풍경 재료로 사용하여 원추형의 경사로를 만들었다. 

뉴욕의 마천루 배경 앞의 도시 재료를 그대로 써서 만든 놀이풍경은 오래도록 뉴욕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이미 어른이 된 후에도 다시 찾게 하는 마력이 있다. 
뉴욕 센트럴파크 안에 건축가 리차드 다트너 Richard Dattner가 설계한 인공 지형이 있는 모험놀이터.
뉴욕 센트럴파크 안에 건축가 리차드 다트너 Richard Dattner가 설계한 인공 지형이 있는 모험놀이터.

일본 도쿄 인근에는 ‘쇼와키넨 공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도 다양한 인공 경사를 가진 독특한 놀이풍경이 존재한다. 거대한 방방이 같이 패브릭으로 지형을 만든 곳도, 사다리꼴 입체로 잔디 언덕을 여러 개 만들고 그 사이에 물안개를 분사하는 곳도 있다. 

또한 형형색색의 그물을 이용해 거대한 그물 언덕을 만든 곳도 어린이들에게 입체성과 공간감을 갖고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어느 아이의 표현처럼 놀이터가 ‘위로’까지 담을 수 있는 다양한 놀이풍경이 생겨나길 바라며. 
일본 도쿄 인근의 쇼와키넨 공원의 놀이풍경, ‘레인보우 해먹’.
일본 도쿄 인근의 쇼와키넨 공원의 놀이풍경, ‘레인보우 해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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